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시인은 원수들에게 꽁꽁 둘러싸여 고립무원의 상황이다. 그들의 막강한 공격력이 압도적인 데다가 언어적, 심리적 비방은 두려움과 공포를 증폭시킨다. 처음 1-2절은 대적하는 무리가 엄청나게 많다는 시적 암시를 세 차례 언급된 히브리어 ‘םיבר’(라빔)을 활용한다. 세 번 모두 복수형으로 시인의 적대자, 치는 자, 비방하는 자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며 절망적인 현실을 강화한다. 사방이 온통 적이니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야웨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탄원시의 특징적인 구문이다. 원수들의 공격과 비난은 시인을 더 깊은 나락으로 빠뜨린다. 시점으로 볼 때 현재에 해당한다.

3-6절의 분위기는 서두의 절박한 현실에 비해 다소 여유롭다. 시인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야웨의 정체성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곧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조리 있게 펼치다가 이윽고 구원의 소망을 길러낸다. 이를 테면 ‘야웨는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3절)등은 이스라엘 신앙인들이 구원자 하나님을 수없이 부르짖고 고백하던 문구다(삼하 22:3; 시 18:2; 115:9; 119:114). ‘머리를 들게 하다’는 본래 권리 회복을 뜻하는 법적인 용어다. 보통 죄인의 신분을 사면할 때 쓰인다(창 40:13). 바빌론 왕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은 지 37년 만에 출옥시키고 ‘그의 머리를 들게 하였다’(왕하 25:27). 죄인의 신분에서 유다 왕으로 복귀시킨 것이다.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분’과 ‘나를 지켜주시는 분’도 시인에게 잘 알려지긴 마찬가지다(시 20:2; 4:8). 

한편 6절의 ‘천만인이 에워싸도’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해설이 필요하다. 메리브보트가 숫자로 ‘일 만’을 가리키지만 개정은 ‘천만’으로 번역해 서두에서 시인을 포위한 원수들의 엄청난 위용을 보여준다. 관용적으로는 ‘수많은,’ ‘셀 수 없는’ 경우에 쓰인다(신 32:30; 삿 20:10; 시 91:7). 라반이 누이 리브가를 이삭에게 보내며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라’며 복을 빈다(창 24:60). 점층법을 활용한 문장도 이따금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 다윗은 만만’에서 사울과 다윗의 차이를 숫자로 대조시킨다(삼상 18:7; cf. 신 33:17; 미 6:7). 우리말은 ‘천만인,’ ‘일만,’ ‘만만’ 등 다양하게 옮겼으나 해당 숫자에 있지 않고 무수히 많다는 의미로 쓰인다(민 10:36; 렘 32:18; 미 6:7; 아 5:10). 시편 3에서 ‘천만인’은 엄청난 수치에 압도된 초라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대적들의 공격과 포위와 비방이 결코 두렵지만 않다. 왜냐하면 야웨가 그의 방패가 되어 구원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시점은 과거의 상황이다.

엄밀히 말하면 3-6절의 지식과 정보는 시인이 여태 배우고 알고 있던 기억 속의 하나님이다. 지금은 절대자의 도움과 구원이 절실하기 때문에 필사적인 요청을 할 수밖에 없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부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름, 야웨를 찾기에 이른 것이다. 

야웨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어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도다(7절). 

시인은 광야 유랑 시절 법궤가 항상 이스라엘보다 앞서 미지의 공간으로 이끌었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행진이 시작되기 전과 후에 궤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야웨여 일어나소서. 주의 대적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야웨여 돌아오소서, 수천의 이스라엘에게(민 10:35-36). 

이른 바 ‘법궤의 노래’다. 시편 3이 오래된 기도문을 되새기면서 야웨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절의 네 동사 중 앞의 둘은 명령형이고 나머지는 완료형이다. 특히 후자의 두 동사, ‘빰을 쳤다’와 ‘이를 꺾었다’는 각각 히필과 피엘로서 이미 완료된 상태다. 게다가 ‘원수의 뺨’과 ‘악인의 이’는 상대에게 큰 모욕감을 주는 동시에 악질적인 비방을 근절했다는 의미다(왕상 22:24; 욥 16:10; 애 3:30). 그것은 시인 자신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고백이다. 그러니 ‘구원은 야웨께 있습니다’(8절)는 찬미가 자연스럽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미래의 선취다. 고립과 절망의 탄식이 확신에 찬 찬양으로 바뀌는 놀라운 반전과 희열이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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