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로다

아기예수의 탄생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로다라고 했다. 성탄절,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가 줄 구주이시다. 때문에 모두가 축제분위기로 성탄절을 기다린다. 또한 이번 주는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대림절 마지막주이다. 모두가 정화된 마음으로 다시 오실 아기예수를 기다려야 한다. 헌데 오늘날 인간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산물인 탐욕과 맘몬에 길들여져 성탄절을 상술로 이용하고 있다. 거리마다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등장했다. 교회도 아기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트리를 장식하고 있다.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면, 한마디로 아기예수를 전기로 고문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돈에 취한 종로5가의 일부 목사·장로들의 모습은, 기독교의 성지인 종로5가를 범죄자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지낸 전광훈 목사는 종로5가를 걸어 다니는 목사·장로를 향해 쓰레기들이라고 표현했다. 아담스미스는 정화된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감지 할 수 있다고 했다. 성탄절, 인간 모두는 결손하고, 정화된 마음으로 아기예수를 맞아야 한다.

모두가 재물과 돈, 명예에 취해 하나님을 감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들을 보면,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성지로 불리던 종로5가는 재물과 돈에 취한 목사·장로들로 인해 범죄자의 소굴이 되었고, 쓰레기 하치장이 된지 오래다. 교회나, 정치권이나, 사회나, 모두 썩은 악취만 진동한다. 분열과 갈등을 일삼는 종로5가 한기총의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은 진영싸움이 되었다. 이제 활해 할 수도 없다. 모두가 생명의 양식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로는 아기예수를 기다릴 수 없다. 곳곳에서 죽임당하는 아이들과 노동현장에서 사고로 죽임당하는 노동자들의 한의 소리’, 축제에 참석했다가 압사당한 젊은이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사무친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은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고, 곤궁한 자영업자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친다. 여기에다 물가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고, 경제는 말이 아니다. 정부를 믿고 따라야 하는 국민은 정부도, 정치인도 못 믿겠다고 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가장도 적지 않다.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인류 모두는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노숙자와 어르신에게 희망이었던 밥상공동체는 문을 걸어 잠갔다. 모두가 힘든 대림절, 성탄의 계절,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명예와 권력, 맘몬에 길들여져 악취만 풍긴다. 교회가 세상보다도 못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용산 핼러윈데이에서 젊은이 159명이 압사 당했다. 사고 50일이 지났다. 이로 인해 우리사회는 슬픔에 잠겼다. 이들을 위로해야 할 교회는, 오히려 이들을 비난하기에 바쁘다. 일부 목사와 교인들의 입에서는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로 2차 가해를 자행한다. 이웃의 아픔을 모르는 교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탄의 기쁨을 맞이할 자격조차 없다. 그럼에도 거리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등장했고,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도 울린다.

이웃의 아픔을 모르는 인간들은 다시 오실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을 함께 나눌 자격조차 상실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웃의 아픔을 모르는 인간들은 다시 오실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을 함께 나눌 자격조차 상실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힘, 하나님의 참사랑(복음)에서 나온다
이웃 아픔 모르는 인간
, 성탄의 기쁨 나눌 자격 상실

노예로 살지 말고 자유민으로 살라

성탄절은 모두가 즐거워하고, 함께 나누며, 다시 오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성탄절이 인류 모두의 명절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성탄절이 아니다. 교회만의 성탄절도 아니다. 기독교만의 명절도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하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늘에는 영광이며, 땅에는 평화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과 기아로 고난당하는 민족, 북한동포, 그리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기쁜소식이며, 평화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탄생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소식(복음)이다.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술과 환락 속에서 본능을 발산하는 성탄절로 착각하고 있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도 요술을 부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연말연시를 맞아 주춤했던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확진자는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은 즐겁지 않다.

기독교인들도 세상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혼란에 빠져들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서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성탄절의 뜻을 되새기며, 정화된 마음으로 다시 오시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한다. 요즘 자유라는 말처럼 회자되는 말도 없다. 예레미아 237절과 8절을 보면,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이스라엘 민족에게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 땅에 거하는 모든 민족을 자유민으로 대한다.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그 대신에 이스라엘 집의 자손이 쫓겨 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고향 땅에서 살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체로 대하신다. 오늘날 종교의 자유를 집단화하는 것은 맹종이며, 사이비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자유를 외치는 인간들이, 한 인간을 맹종하며, 이단에 빠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노예습성을 지닌 이들은 자율성이 없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억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집단적인 억압을 처절하게 경험했다. 오늘 일본은 일제식민지 통치를 기억하며, 한국인을 아무렇게나 대하려고 한다. 한국인 여행객이 머무는 여관방에 욱일기천황만세의 글을 걸어놓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정부는 이런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국민들의 아픔, 치욕적인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다. 국민을 노예취급을 하겠다는 지도자들은 슬픔을 겪는 자들에게 탄식도 못하게 한다. 자신을 향해 비판도 못하게 한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노예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했다. 예레미아도 노예로 살지 말고, 자유민으로 살라고 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중략)/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한일서 415-21)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우리가 살다보면, 자랑스러운 이웃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이웃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행을 겪고, 억압을 당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정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공의를 상실했다. 박해받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고난을 당하더라도 행복하다. 기쁨이 흘러넘친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70-80년대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고난을 당하면서, 군사독재정권에 맞섰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피압박을 당하면서도, 일경의 총과 칼에 맞서 맨주먹으로 항거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귀영화를 탐하는 교회의 일부지도자는 피 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 일제하에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배교하는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 기쁜 소식을 잃어버렸다. 복음을 상실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잉태했다는 것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자리는 탐욕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내어주고, 짐승 곁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그렇다 예수님은 연약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유대의 권력자, 로마폭정의 대치점에 서서 사랑의 힘과 정의로 심판하고,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약함을 통해 강한 힘을 보여주셨다.

사랑 없이 자유는 없다. 복음의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힘은 하나님의 참사랑, 복음에서 나온다. 원한과 증오, 미움의 힘은 결국 불행을 가져다가 준다. 잠시 승리의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결과는 나라와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오늘날 자유를 강조하는 지도자들에게서, 인간존중의 정신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면서 법과 정의, 상식을 강조한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자유를 누린다. 한마디로 이들의 자유는 부자, 성공한자. 대기업 회장 등 기득권자의 자유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망각한 이들을 인간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이들에게는 장애인, 노동자. 용산 참사 희생자, 노숙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노동을 천시하는 인간들이다. 오늘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세계정세를 보면 우울한 내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망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서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성탄절,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대망해 본다.

자유인은 성탄절을 기다린다

성경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동정녀 탄생’, ‘예수라는 이름’, ‘임마누엘등 중요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즉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인류에게 가져다가 주었다.

억압과 수탈의 체제 속에서 틀에 박힌 생활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가 열리지 않는다. 미래가 없다. 소망도 없다. 본능과 습관의 굴레에서 소망 없는 삶을 이어간다. 불의와 거짓의 토대 위에서 혼자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리고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교인들과 국민들에게 혼란과 혼돈만을 준다. 이것이 오늘 교회지도자, 정치지도자의 모습이다.

불의와 거짓의 토대 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메시아사상이 나올 수 없다고 밝혔다. 억압과 수탈의 체제서 해방돼, 닫쳐진 사회, 닫쳐진 역사를 연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밖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예수(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구원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담겨져 있다. 자기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이름은 그 자체로 그의 백성과 결부되어 있다. 백성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가장 큰 죄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죄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죄가 크다. 모두가 성령을 잃어버려 나의 마음에서 너의 마음, 그의 마음으로 성령이 흐르지 않는다. 고인물이 섞듯이 인간의 마음,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성령이 흐르지 않아 고인물과 같이 썩고 있다. 모두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죽어가는 노동자를 보고,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모두가 사랑을 잃어버렸다. 생명의 양식을 잃어버렸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불교는 개인의 수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유교 역시 가진자들의 도덕성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철저하게 나를 넘어 너와 그에게 맞추어져 있다. 한마디로 인류 모두를 위한 종교이다. 때문에 인류 모두가 성탄절을 기다리고, 다시 오시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정화된 마음으로 기다린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율법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비루들과 계약을 맺었다. 자유인은 정의와 사랑으로 통치 할 수 있다. 하지만 노예로 산 사람은 자유, 정의, 사랑으로 통치 할 수 없다. 이들을 강제적으로 통치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율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거부하지 말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국민은 성숙한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눈이 멀어, 귀가 어두워 성숙한 지도자, 보지를 못한다.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실수를 하게 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사회를 혼란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인생은 답이 없다. 신앙생활도 답이 없다.

그래서 세계민족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그의 나라를 갈망하며, 그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오늘날 세계는 힘에 의해 하나님의 질서가 파괴되고, 가진자들에 의해 불의와 거짓이 판치고 있다. 모두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생명의 양식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져다가 준 평등한 세상에서 이탈한 것이다. 인간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위선적인 신앙과 사회의 술과 환락으로는 다시 오실 아기예수를 맞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주일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거지로 오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어떤 어린이가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서 정성껏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밤새 기다렸지만,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지 않고, 거지와 처량한 노인, 장애인만 왔다가 갔다.

아이는 거지와 노인, 장애인을 매몰차게 내쳤다. 이 아이는 왜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지 않고, 거지와 처량한 노인과 장애인만 오냐고 땡깡을 부렸다. 이 때 예수님이 나타났다. 3번이나 너를 찾아 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른다. 대림절, 성탄의 계절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직접 통치 할 때, 억압과 착취, 불의와 거짓이 사라지고 평등한 세상이 오기 때문이다. 모두가 재물과 돈에 취해, 귀가 막혀, 눈이 멀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정신을 잃어버렸다. 임마누엘은 로마 등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침략 앞에서 나온 희망의 메시지이다.

1천년동안 나라 잃고, 주변 강대국의 지배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 고난과 시련을 겪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마누엘의 현실로서 그리스도가 탄생했다. 기다리는 아기 예수는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고통을 당하는 인류에게, 전쟁과 기아로 고난을 당하는 민족에게, 이태원 참사로 슬픔에 잠긴 희생자와 그 가족에게 하나님의 평화의 소식을 전해 줄 것이라고 국민 모두는 소망해 본다.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하지만 생명의 양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술과 환락으로 국민들에게 혼란과 혼돈을 주고 있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자.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자. 정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자. 정화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다는 평신도 신학자 허버트의 말을 귀담아 듣자.

2022년도 대림절, 성탄절은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 불황 속에서 실의에 빠진 사람과 항상 죽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노동자, 보다 낳은 삶을 위해 조국을 떠나는 이주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약소국가 국민. 전쟁으로 고난을 당하는 이웃국가 국민들에게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되도록 모두가 노력하자. 그리고 굳게 닫쳐진 사회, 정의가 실종된 사회, 상처투성이인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 구원과 해방을 가져오는 메시아의 탄생은 해산의 고통만큼이나 아픔을 동반한다는 것을 깨닫자.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는 해산의 고통만큼이나 어려운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기다리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며,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는 것이다. 2022년 하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성탄의 계절에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보잘 것 없는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보자.

동자동 쪽방촌에 민족사랑교회를 세워놓고, 코로나19 펜데믹 속에서 곤궁하게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일하는 임호성 목사를 보라. 마포 한 귀퉁이에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는 장헌일 목사를 보라. 이태원 핼러윈 참사현장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주는 목사를 보라.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일하는 목사들을 보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외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사를 보라,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봉사하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을 보라.

이들은 돈에 취해, 물질에 취해 용인과 장위동을 왔다 갔다 하며, 이중적인 행동을 보이는 모 단체의 목사들과는 다르지 않는가. 이들이 바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용인과 장위동을 오가는 모 단체의 목사들은 분명 예수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들은 생명의 양식을 잃어버렸다. 종로5가를 범죄 집단, 쓰레기 하치장으로 만들고 있다. 교인들에게 혼란과 혼동의 고통을 주고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정화된 마음으로 대림절, 하나님을 기다려라.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