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새해, 새로운 세상 열렸다

계묘년 새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러나 세상 어디를 보아도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는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슬퍼하는 자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전쟁과 기아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아우성치고 있다. 남과 북은 적대적 관계의 상처만 깊어간다. 나라의 경제 또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모두가 못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렇다고 종교계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아니다.

복음의 빛을 상실했다. 분열과 갈등의 늪은 깊어지고, 문을 닫는 교회 역시 줄지 않고 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용산 핼러윈 행사로 많은 젊은 청년들이 희생을 당했다. 유가족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이들을 위로해야 할 교회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위로해야 할 일부 성직자와 교인들은 이들에게 오히려 2차 가해를 가하기도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복음의 빛, 하나님의 참사랑을 상실한 결과이다.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자기 안에 갇혀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탐욕에 길들여져 우는 자의 아우성을 듣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득권자, 가진 자들의 눈물을 닫아 주기에 바쁘다. 오늘 한국교회가 정체성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참사랑, 복음을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민족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나라의 경제, 국민들의 삶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서, 교회가 계속해서 십자가탑을 높이는 데만 경쟁을 벌인다면, 분열과 갈등만을 일삼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민족의 미래도 없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결단해야 한다. 슬픈 자를 위로하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평화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기쁜소식=하나님의 참사랑)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과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참사랑, 기쁜 소식, 복음의 빛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분열과 갈등을 끊어내는 결단을 해야 한다. 계묘년 새로운 세상을 맞은 한국교회는 노동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을 영접하고, 용산 참사로 자녀를 잃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부모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학대받는 어린아이를 안아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교육해야 한다. 예수님은 단호한 결단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2)어떤 사본에는 44절과 46절에 48절과 같은 말이 있다/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을 찍어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3)어떤 사본에는 44절과 46절에 48절과 같은 말이 있다/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애꾸눈이 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4)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누구나 다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다”(공동번역성경 마가복음 943-47)

교회지도자, 의지 꺾으면서 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인간 헛되 욕망·교만·허위·쾌락 버리고 새 인간이 되자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는 결단 중요

예수님은 온화하면서, 단호했다.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꾸짖고, 해롯왕을 가리켜 여우라고 했다.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잘라 버리라고 했다. 눈 때문에 유혹을 받아 죄를 짓게 되면, 눈을 빼버리라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인간이 손을 자른다고, 눈을 빼버린다고 범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도박에 미친 사람이 손을 자른다고 도박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아니다. 양손을 자르면, 발가락으로 화투를 한다는 말이 있다. 욕심과 습관을 끊지 않으면, 손을 잘라도 아무 소용없다. 손은 내 의지의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킨 인간들이, 특히 종로5가의 목사·장로들이 내 의지를 꺾으면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우리의 의지는 조금도 자유롭지 않다. 인간은 헛되 욕망과 터무니없는 교만의 노예이며, 허위와 쾌락의 노예이다. 죄의 노예가 인간의 의지인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휴머니스트로서 의지의 자유를 말한다. 반면 루터는 진지한 신앙인으로서 의지의 노예성을 주장했다. 도덕이나 교육의 일정한 범위 안에서 의지를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존재의 새로운 탄생을 말하는 종교적 차원에서 의지의 자유를 말 할 수 없다.

얼마 전 30대 젊은이가 파주에서 택시기사와 집주인을 살해했다. 가해자는 자유로이 선택해서 살인한 것이 아니다. 원한과 분노, 강한 욕망이나, 증오에 사로잡혀 살인한 것이다.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이라고 해도 자유로이 선택한 행위라기보다도, 그의 의식을 사로잡은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의 강제에 굴복한 행위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해방시키거나 변혁,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없다. 인간은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다.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맡김으로써 자신에게서 벗어나 의지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손과 발이 범죄 하거든 끊어내라는 예수님의 단호함은 우리 자신의 자기를 끓어버리라는 말이다.

이 말은 돈이나 권력에 매달리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고 남을 격하시키는 자기를 끊으라는 말이다. 즉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사는 자기를 떠나라는 말이다. 현대산업기술로 인한 산업문명은 편하게 좀 더 쾌락을 누려보자는 것이 아닌가. 산업의 발달은 인간들이 그야말로 편리하고, 안락한 시대에 살게 했다.

이는 곧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삶에로, 자기숭배로 빠지게 했다. 오늘날 인간은 재산을 모으고,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로 격하시켰다. 타인을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만들었다. 너를 죽여 내가 생존하는 경쟁사회가 됐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웃교회를 죽여야만 내 교회가 산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문명의 발달은 교회에서 교인을 내쫓는 결과를 가져왔고, 중대형 교회는 떠난 교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웃교회 교인을 빼앗아 온다. 교인 쟁탈전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로 인해 교회의 질서, 하나님의 질서, 교회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 교회의 참된 관계도 무너졌다.

물질의 축복이 곧 하나님의 축복

물질 때문에 교회의 분쟁이 끊이지를 않고, 연합단체의 갈등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연합단체에 소속한 교단의 교단장 및 총무들은 돈의 흐름에 대한 감지능력이 뛰어나다. 이들이 돈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 그러면서 안 그런 척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위선적인 모습만 드러낸다. 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물질적인 존재로 타락했다는 것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또한 타인을 이익추구의 대상,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삼는다. 또 참된 인간관계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고, 이들은 근본적인 위선에 빠진 위선자이다.

이들은 자신이 물질적인 존재로 빠졌음에도, 그렇지 않은 듯 살아간다. 타인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위선은 사랑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웃에게 상처만 안겨주는 자신을 닫아버린 위선자이다. 위선자는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사랑을 줄 수도 없다. 위선자인 일부 한국교회 지도자는 밥도, 돈도, 욕정도 풍족할지 모르지만, 영혼에 있어서는 고아와 다르지 않다.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에게서 아니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깊이 빠진 이간들에게서 고아와 같은 참된 친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보니 인간들은 고독하다. 고독한 인간들 사이에서 우울증 등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한마디로 인간들은 삶의 깊이를 잃어가고 있다. 인간들은 갈수록 재치 있고 영리해지는데도, 우직함이 없다. 아름답고 세련되는데도 단순하고 소박한 맛은 없다.

이런 상태로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이들을 종교지도자로 따르는 인간 모두는 2023년 기묘년 새해를 맞았어도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로 나갈 수 없다.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자유를 누릴 수도 없다. 모두가 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인다. 모두가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다.

이들에게는 자신을 강제 할 수 있는 율법이 필요하다. 율법은 인간을 타율적으로 본다. 율법 아래서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자율성이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자유를 주셨다. 복음은 정숙한 인간이기를 보기하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희망이다. 메시아의 탄생은 한마디로 기쁜 소식, 복음이다.

예수님은 공적활동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며 기도했다. 악마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예수님을 유혹했다.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에 대해서 단호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 헌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 있는 인간들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떡이나, 돈이나, 섹스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인간은 허무하다.

계묘년 새해, 새 인간이 되자

오늘날 인간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가슴이 돌덩어리가 되어 메마르고 냉정하다. 이웃을 사랑하기에는, 풍성한 삶을 약하기에는 인간의 마음이 너무 차가운 것이 아닌가. 소유욕과 쾌락애의 욕구에 내맡겨진 인간, 물질적인 존재로 변해버린 인간, 이기적인 자기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예수님은 결단하라고 한다. 새 인간이 되라고 한다.

내 의지를 직접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손, 범죄 한 손을 잘라버리라고 한다. 손은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을 한다. 소유욕을 충족시키며, 부정한 재물을 움켜쥐고 지배욕을 충족시키려고 강권을 휘두른다. 또 발을 끊으라고 한다. 내가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길로 빠져드는 유혹에서 해방되라는 말이 아닌가.

또한 눈을 빼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감각적인 욕심에 끌려 수동적인 삶을 살지 말고, 뚜렷한 주체성을 가지고 살라는 것을 교육한다. 인간 모두는 외부적인 모습에 사로잡히지 말고, 새로운 눈을 뜨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새해, 새 인간으로 거듭나라는 것이다. 손을 끊고, 발을 끊고, 눈을 빼라는 예수님의 결단의 말은 인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폭력적 억압과 수탈의 악순환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손과 발은 폭력적 악순환의 사슬에 매여 있다. 인간의 눈은 이 악순환의 거대한 체제에 현혹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결단하라고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가 열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재물에 의지하고 돌로 만든 떡을 먹으면서 이기적인 탐욕의 노예가 되어 손과 눈으로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다가 모든 것이 소멸되는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기적인 안락의 삶에 빠져 있는 손을 끊고 발을 끊고 눈을 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없다. 범죄 한 손을 끊고 발을 끊고 눈을 뺄 때, 하나님의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한다. 이제 탐욕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새 인간이 되기 위해 결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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