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시편 119는 성서 통독의 최대 장애물?이다. 설교자들에게도 시편 119는 기피 대상이다. 오바댜(21절), 학개(38절), 나훔(46절), 요나(47절) 등보다 훨씬 긴 176절을 천천히 읽으면 25-30분가량 걸린다. 또한 히브리어 알파벳을 활용하여 8절을 한 연으로 삼아 22연을 구성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탈무드는 이를 두고 “8의 반복 시”라고 부른다(Berachos 4b). 외형적인 특징 말고도 본문에는 마치 숫자 8을 연상시키는 특정 낱말과 구절이 넘나든다. 시편 119 전체 176절에 ‘토라,’ 또는 여덟 개의 동의어가 반드시 들어있다. 즉 말씀, 규례, 법, 증거, 법도, 율례, 계명, 판단 등을 활용하여 변화를 준 것이다. 여기에는 규칙적인 여덟 행과 다채로운 여덟 단어가 뒤섞이면서 8이라는 숫자의 상징이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8의 활용을 쉽게 찾았다면 이제는 보다 집중해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토라를) ‘잊지 않는다,’ ‘묵상한다,’ ‘즐거워한다,’ ‘소성케 하라,’ 그리고 ‘찬양한다’는 내용이 여덟 차례 언급되거나 암시된다. 

결의: 잊지 않는다(로 에쉬카흐:16,61,83,93,109,141,153,176)
실천: 읊조린다(시야흐: 15,23,27,48,78,97,99,148)
기쁨: 즐거워한다(에쉬카: 16,24,47,70,77,92,143,174)
살림: 살리소서((하예니: 25,37,40,88,*107,149,154,156,159)
찬양: 찬양한다(히랄레티카:164-하루 일곱 번, 62: 새벽)

시편 119는 어떤 구절에서도 ‘8’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곳곳에 배치된 8의 연상과 상징을 통하여 시인의 정교한 믿음과 치열한 고백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구약의 신성한 숫자 7 대신 다소 낯선 8을 활용하였을까? 창조에서 드러나듯 7은 시인이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을 가리킨다면 시편 119의 8은 이 세상을 넘어선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이다. 이 점은 구약에 등장하는 숫자 “8”의 예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즉 노아의 가족 8 명은 홍수로부터 살아남아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산다. 아이가 태어난 지 8 일 만에 할례(割禮)를 받는다(창 21:4). 병에 걸리거나 부정한 사람이 깨끗해지면 8 일 후에 제사를 드린다(레 14:10,23). 에스겔 성전에 오르는 계단이 여덟 개(겔 40:31)이며 희생제물을 잡는 상이 여덟 개(겔 40:41)이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것은 사실 ‘8’일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8”은 기존 질서의 단절이며 동시에 이전 세상과는 전혀 다른 시작이라는 상징성을 확보하게 된다. 또한 히브리어 8(הנמשׁ: 셰모나)은 기름(ןמשׁ: 셰멘)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한다. 기름은 스스로 불살라 전혀 새로운 물질 빛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시편 119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는 8은 기름처럼 자신을 변형시켜 육체와 과거로부터 단절되는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시편 119의 작성 시기는 포로 이후로 추정된다. 즉 8절을 기본으로 한 각 연(聯)에 토라를 가리키는 여덟 개의 단어를 8행(行)에 각각 배열함으로써 숫자 8의 의미가 점층적으로 최고조에 달한다. 다시 말하면 어두웠던 포로의 치욕과 아픈 기억을 끊고(斷) 하나님의 말씀, 토라를 의지하여 새롭게 출발하려는 결단을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렇듯 토라를 예찬하면서도 기발한 착상과 독특한 구성을 두고 ‘시편의 최고 걸작,’ ‘위대한 시편’으로 불린다. 일찍이 루터는 이 시편을“황금의 ABC,” 델리치는 “그리스도인의 황금 입문서,” 스펄전은 “진리에 관한 알파벳,” “천상의 도시”라고 칭송한다. 

시인에게 토라는 빛과 생명,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이다. 시인은 토라가 규범의 집합체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 방식이며 그로 인하여 살아있으며 찬양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따라서 히브리어 알파벳 22개를 각각 8절 단위로 작성한 이 시편의 구조적인 형태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신학적 의도가 담긴 정밀한 문학 장치이자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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