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낙서’라는 것은 ‘장난으로 아무렇게나 써버리는 글자’로 풀이되어 있다.

그것은 때때로 아무 의미의 연결도 사상도 없고 마치 정신착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독백처럼 무책임한 언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 같은 무질서, 이감은 무의미가 곧 천재의 쓰린 고독을 대변(代辨)해 주는 가장 진실한 시의 형태가 아닐까?

낙서는 장소에 따라 그 사람에 따라 가지가지다. 변소의 낙서에서부터 가장 지루한 강의시간에 대학노트에 갈겨버린 낙서, 그리고 소년들이 자기 손바닥에 그려버린 낙서에 이르기까지 그 장르와 주제가 가지가지다. 이러한 낙서 중에서 가장 솔직하며 인간적이며 그리고 가장 창피스러운 인간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낙서는 변소의 낙서다. 사람들은 공중변소의 맞은 벽과 직면하고 앉았을 때 그 너무나도 대담한 표현과 기발한 아이디어에 당황하는 수가 많다.

어느 일류대학의 변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재들만이 모였다고 자부하는 이 대학 캠퍼스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그들의 변소는 항상 학교 당국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교수의 때마다 이 문제는 누군가의 발언으로 진지한 토의 대상이 되고 교수들은 학문을 위하여서만 바쳐오던 그들의 위대한 두뇌구조를 이 문제로 하여 더욱 착잡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안 된다. 내용은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다만 그 같은 쑥스러운 낙서들이 또 어쩌면 그렇게도 기발한 아이디어의 형태로 매일매일 그 변소 내부의 사면벽(四面璧)을 메꿔가고 있는지가 두통거리였다. 결국, 어느 교수의 발언이 채택되어 그 변소의 내부들은 완전히 새까만 먹칠로 신장개업(新裝開業)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 다음의 일이 더 희한했다. 어느 부지런한 친구가 변소마다 분필을 준비해놓고 가로되, 「여기 그대들을 위하여 흑판이 마련되어 있으니 앞으로 더욱 많이 애용해 주시압」 이렇게 짓궂도록 낙서전쟁(落書戰爭)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낙서를 즐기는 것은 어른들만은 아니다. 어린애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그 무엇을 해야 한다. 종이가 마련되어 있으면 그들은 어떠한 글씨나 그림으로 그 공백을 메꿔버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이들은 어른들의 감시가 없는 집 담벼락에도 빈자리만 있으면 그들은 아무것이라도 그리고, 지껄여 놓고 돌아선다.

어른들의 낙서, 철없는 애들의 낙서— 이토록 낙서해야만 하는 낙서족(落書族)들은 과연 그들의 사상이 무엇이며 거기서 그들은 무엇을 구하는 것일까?

고독- 그렇다. 이것이 고독이다. 고독이 이들이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하는 주모자다, 그러므로 낙서는 곧 고독을 표현하는 가장 솔직한 형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낙서는 천재들이 즐긴다.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알고, 그러나 자기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 이 우매한 공간 속에서 그들은 결국, 그것을 누구에게 보이자는 것도 아니요, 자랑해 보자는 것도 아니요, 다만 무한한 허공을 향하여 무한히 지껄여보는 낙서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예쁘게 엮인 어떤 시집의 시보다도 더욱 시다운 시가 될 수 있는 것, 천재들이여! 시인들이여! 그대들에게 이 시인의 영광을 돌려줄 것이니 서슴지 않고 많은 낙서를 하거라.

저 우매한 속물들의 얼굴을 향하여 아무리 이해할만한 논리를 일러 주어도 못 알아들을 세상일 바엔 차라리 아무 사상도 의미도 없는 낙서가 얼마나 더 진실한 것이랴!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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