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땀을 뻘뻘 흘리면서 테니스에 열중해 있는 서양 외교관들을 보고 조선 양반이 혀를 끌끌 차면서 중얼거렸다. “한심한 양반들이군! 저런 고된 일은 하인들에게 시키면 될 터인데 말이야” 물론 남의 세계를 내 틀로서 재단해서는 안 된다(출처 : 고정식 웃기는 철학)

오늘날 신자들은 기도를 하인에게 시키듯 남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물론 “그럴 수는 없지요!”라고 말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기도에 대한 다양성을 보이며, 의견들을 쏟아내기도 한다. 물론 “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 부탁이 습관적으로 오가는 경우는 숙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당사자도 기도를 하겠지만 힘을 더해 달라는 의미로 서로의 마음을 함께 한다는 함의로 알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는 시간이 없어서, 또는 여기에 자기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생각 등에는 문제가 있다. 나아가 본인의 기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불안감 등은 분명 문제가 있다.

물론 부탁을 받은 이웃교회 성도, 본 교회 성도이건 간에 대답은 당연 “예! 제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이는 대형교회, 중소형 교회 목사님들이나 신자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웃교회 성도들이 섬기는 교회도 기도할 일이 많을 터인데, 과연 그리한다는 것에 허언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때 “기도는 자기가 드려야지요!”라고 하면 괜한 책망, 까다로움 등을 보이는 것 같아 입을 닫는 이도 있다. 물론 서로에게 기도뿐만 아니라 상호 간 관심사를 나누는 성령 안에서의 교제 등은 성도의 은혜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기도하지 않아도 남이 기도해주면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리라는 자세는 무책임하지 않은가? 이는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은혜에 소홀함이기도 하며, 자칫 아무 의미 없는 습관적 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도는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하는 것이 개혁교회 신앙이며, 성도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는 말씀과 같이 어떤 공통의 관심사를 놓고 한마음으로 기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를 넘어 개인적 사적인 생활까지는 좀 지나친 의지가 아닐까? 

문화적 차이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하인들에게 시키면 될 터인데!”라는 인식과 유사성을 갖는 지나친 기도 부탁은 심사숙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등,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확신 속에 스스로가 좀 더 적극적으로 자기의 소망을 아뢰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5-8).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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