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수 강 목사
오 수 강 목사

초대교회를 이어온 현대 교회는 명칭과 교리 가르침의 내용은 비슷하다고는 하나 실제 초대교회의 원형과 비교하면 다른 면들이 아주 많다. 천주교 시대와 종교개혁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속화된 부분을 도려내고 치료를 한다고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자 안타까운 일이지만 옛 종교인의 치부가 다시 살아나서 교회를 구태의연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 또다시 혁신과 개혁을 외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신앙의 좋지 않은 습성을 가진 종교인들이 되살아 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끊임없이 개혁과 거듭남을 교훈하나 이를 받아들인 교회는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개혁을 외친다. 그러다 보니 어느 부분을 개혁해야 하고 어떤 모습이 개혁된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개혁은 어느 한 날 완성함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늘 과거로의 회기를 스스로 범하면서 그것이 보수로 생각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좀처럼 새로운 것을 받아 드리지 않으려 한다. 또한 계속하여 진행되어 온 믿음의 행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성경에 계시 된 진리를 현재의 신앙의 타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꺼려한다. 문제는 잘못된 신앙의 행태를 오래 된 낡은 옷이 몸에 익숙하여 벗어버리기가 아깝게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신앙의 잘못된 비 성경적인 것들이 우리의 기존신앙에 들러붙어 꼭 진리로 둔갑해 일평생 함께하다 보니 진리로 바꾸기가 무척 어려운 현실이다. 이는 비성경적 요소들은 바로 바리새적 요소요 버려야 할 비진리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비진리가 오래도록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하다 보니 그것이 진리 화 되어 오히려 성경의 진리가 배척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예를 들면 종교개혁과 함께 생산된 약식세례가 오백 년이 넘도록 고쳐지지 않고 있다. 비성경적 부분이 성경화 되어 신자들이 의식 속에 꼭 성경에 계시 된 의식을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고 문자적으로 믿지 않아도 된다는 의식을 갖게 했다. 성경은 왜 물이 귀한 시대에 요단강에서의 세례를 기록하고 있는지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뒤로 한 채 사람들의 편의만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리고 교회 건물의 대형화와 개개인의 거듭남과의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목표가 된 것은 역시 세속적으로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는 방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더 깊이 보면 성경에 등장한 바리새인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가식적으로 보이도록 한다. 철저한 십일조와 안식일 준수, 하루에 정한 기도 시간 엄수, 구제 등을 엄격하게 지킨 자들로 등장한다. 그런데 현대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자들은 거의 주일만 그것도 예배 한 번 겨우 참석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므로 기독교도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전형적인 바리새인 요소의 극치가 아닌가 한다. 그들의 속을 보면 성경은 읽지 않고 기도는 겨우 삼시세끼 밥 먹을 때 초 스피드로 하고, 구제나 전도는 가끔 신앙 양심에 의해 신자의 의무를 거의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영적 의무인 전도와 봉사는 생각은 할지 몰라도 제대로 된 실천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듯하다. 이는 신앙과 실천이 제대로 맞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지도하는 지도자들의 신앙과 실천에 문제점이 있지 않은지도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본래 교회가 세상에 존재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성경의 기록은 알고 있어도 신자들은 지도자들이어떻게 행동에 옮기느냐에 따라 신앙이 달라진다고 한다. 먼저 교역자들의 신앙 실천의 의지는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선교 초기 서양 선교사들의 순교 정신은 한국 초기 교역자들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다. 또한 초기 한국 교회 교역자들의 신앙이 또 그대로 신자들에게 전승 되어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하는데 기여 했다. 그러나 선교 2세기를 넘다보니 한국교회 전반적인 신앙의 실천이 의식화되고 화석화 되어 종교성은 있으나 바리새적으로 변질되지 않았는지 걱정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이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소명을 감당하려면 지금의 현상을 탈피해야 한다. 부흥을 위하여 남다르게 애써 성장에 힘을 쏟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외형 성장을 지향하고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초기 교회의 장점인 서로 유무상통하는 교회로의 전향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세속적인 빈정거림이 한국교회를 욕보이고 있다. 겉으 보이게 성장한 한국교회가 초기 교회 시대 유대교가 예수님에게 질타를 받았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영적으로의 지속적 성장은 바리새적 요소를 제거함이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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