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 간에 한일정상회담에 후폭풍이 거세다. 두 나라 정상이 12년 만에 셔틀 외교복원으로 관계 정상화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과거사 문제를 양보라는 틀 안에서 해결하려 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평가다.

한일 정상이 그동안 멀어졌던 두 나라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로 한 건 과거사 문제와 실질적 협력 사안을 분리 대응하는 이른바 투트랙 기조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일본은 반도체 수출규제를 4년 만에 해제했고 우리는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완전 정상화를 선언하는 등 상응하는 조치로 화답했다.

이처럼 한일 양국 정상이 두 나라 사이에 막힌 장벽을 허물게 된 건 과거사에 언제까지 발목 잡힐 수 없다는 윤 정부의 결단이 뒷받침됐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일본의 상응하는 조치가 반드시 수반돼야만 한다.

문제는 일본이 우리 정부의 선제적 조치에 맞는 성의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시다 총리는 역사 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 입장을 전체적으로계승한다라고 했지만, 구체적인 사과와 참회의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일부 언론이 위안부 합의와 독도 문제까지 거론됐다는 보도에 대통령실은 부인하고 나섰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감정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한일정상회담 이후 일본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한국이 통 큰양보를 했다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다. 여기서 일본이 느끼는 통 큰양보란 우리 쪽에선 대승적 결단이지만 일본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는 뜻이다. 즉 과거 한국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 책임에 따른 배상 없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는 의미다.

일본이 연일 축제 분위기인 반면에 국내 여론이 날로 악화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외교 및 평화 관련된 연구자와 단체들은 지난 1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한일정상회담을 최악의 외교 참사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정부가 상호 이익 교환이라는 외교의 기본상식을 깨뜨렸다며 연일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이번 한일정상회담은 양국의 미래와 특히 안보 협력을 위한 선택적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모든 걸 양보하고도 별 실익이 없는 정상회담이라면 굴욕적 투항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더구나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행위로 인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고통을 치유하기는커녕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를 정부가 자행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대법원이 강제 징용에 일본 기업의 직접 배상을 판결한 건 피해를 준 당사자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의 범위를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정부 기금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주고 추후에 일본 기업의 기금 참여를 통한 간접 배상의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피고 기업의 사죄나 기금 참여가 담보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 기업이 참여한다면 모를까 안 해도 상관없는 해법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굴욕적이다. 국민은 이번에 잘못 뀐 단추가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 등 보다 예민한 사안들까지 무력화시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는 감추거나 덮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올여름 기시다 일본 총리의 방한 때 확실한 선을 긋지 못한다면 한동안 잠잠했던 국민적 반일 감정이 들불처럼 타올라 두 나라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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