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목마른 대지에 부슬비가 내린다. 창밖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창밖에 비가 내리면 우리의 얄팍한 가슴에도 비가 내린다. 그리하여 산천초목들이 모두 촉촉이 빗물에 적셔지면 그것은 우리 가슴 속에도 젖어 들어온다.

이렇게 비가 내릴 때 우리 가슴에 젖어 들어오는 것은 그 차가운 빗물만은 아니다. 빗물이 젖어 들고 그리움이 젖어 들고 또 잊어버려야 했던 슬픔과 괴로움이 젖어 든다.

비가 내리면 우리는 어째서 청승맞은 상상에 말려들어야 하는 것일까? 따져봐야 여기엔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빗물이 꼭 눈물 같기만 하므로 사람들은 그로부터 유추(類推)해낼 뿐이다. 즉 비슷한 것끼리 옮아가는 것뿐이다. 그것은 비슷할 뿐이지, 같은 것이 아니므로 비 때문에 눈물을 쏟아냈다면 이것은 완전히 상상에 의한 착각이라고도 활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곧 인가의 생리가 아닐까? 자연 자체는 인간 자신은 아니지만 우리는 자연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읽는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기 얼굴을 진단하고 운명을 따지는 것 이상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그곳에 투영(投影)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느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리다. 그러니까 우리는 비에서 눈물을 유추해내고 비가 내릴 때마다 잊어버렸던 모든 그리움, 괴로움들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비는 그것 자체가 신비한 액체도 아니다. 달콤한 것도 없고, 쓰고 매울 것도 없고, 찝찔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맹물에 지나지 않는다.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의 아주 허전한 액체일 뿐이다. 비가 내려야만 대지의 초목들이 자란다, 초목들이 자라야만 그 초목들을 깎아 먹는 토끼가 자라고, 토끼가 자라야만 이 무기(武器) 없는 짐승을 잡아먹는 늑대가 자라고, 늑대가 자라야만 늑대를 잡아먹고 사는 호랑이가 자라고, 호랑이가 자라야만 그의 등살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박테리아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비는 조물주가 마련해 준 가장 요긴한 자연의 약식(糧食)이요, 그 은총(恩寵)이다.

그런데 비가 아무리 대자연의 양식이요, 조물주의 은총이라 할지라도 비 때문에 때때로 더 많이 울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리인 것을 어이하랴! 구름이 울고, 실버들이 슬픔 때문에 늘어져 있고, 비 맞은 새들이 정말 슬프기 때문에 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가 오는 자연의 모습은 그대로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에게 잊었던 슬픔을 상기시키고 그리움의 농도(濃度)를 짙게 하고 그래서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청승맞은 시를 쓰게 하는 비를 우리는 짓궂다고만 생각해야 할까?

사실은 비처럼 고마운 것도 없다. 대지의 양식이 되고 있다는 뜻에서만 아니라 이것은 그만 못지않게 고마운 정신적인 양식이 되고 있다. 우리에게 지난날의 슬픔을 상기시키고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순간을 만들어 주는 비는 얼마나 자비로운 것인가? 그 순간이 되면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진실해진다. 

슬픔을 기억하고 잊었던 과거를 되새기게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즉 비는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켜주는 가장 맑은 액체다. 그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미(無味)하다는 것이 맑은 순수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내리는 비는 그 순결의 액체로서 인간의 마음을 정화(淨化)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슬픔도 알고 괴로움도 알고 또 무척 외롭다는 것도 알게 하는 비, 괴롭고 더러운 세상에 묻혀 사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고마울 것이, 또 무척 외롭다는 것도 알게 하는 비, 괴롭고 더러운 세상에 묻혀 사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고마울 것이 또 이디 있으랴.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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