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 연 교수.
장 보 연 교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모두가 위선적인 종교인이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는가(?) 교회당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묻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예수님으로부터의 생명의 길을 상실한 위선적인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질타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지극히 작은 형제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했다. 분명 십자가에서 살해당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입고 쓰러진 강도 만난 자의 모습으로 현존하고 계시다. 이 세상에서 천대받는 자들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에서 모독을 당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지 않는가. 

오늘 강도만난 이웃은 손해를 보면서 농사를 짓는 농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상처받고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강제징용자, 위안부 할머니, 전쟁과 기아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 자연재해로 고난당하는 튀르키에와 시리아 국민이 아닌가. 우리는 이들을 통해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를 수 있다. 

내 자신의 문제와 내 가정의 문제, 내 교회의 문제에만 집착하면, 참생명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수 없다. 밀페된 자아 속에서는, 밀폐된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는, 내 교회만을 주장하는 이기적인 교회에서는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나 자신을 열고, 나의 삶을 열 때, 밀페된 공간을 열 때, 상처받은 이웃을 발견하게 되고, 상처받은 이웃에게서 충만한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모두가 내 안에 갇혀, 소유욕과 지배욕이 가득해 강도만난 이웃, 상처투성이인 이웃을 발견하지 못하고, 바벨탑을 쌓고 있다. 이것은 죽음의 길에 이르는 것이며, 예수님부터의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모두가 물질문명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눈이 어두워져, 틀에 박힌 기계문명에 얽매여, 아파트 투기의 박스에 갇혀,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다. 예수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실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강도만난 이웃을 보고도 레위인과 대제사장과 같이 위선자가 되어 못 본 척 돌아서 간다. 이들은 진정한 이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강도만난자의 진정한 이웃을 사마리아인을 에로 들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업신여기며,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강도만난 이웃을 돌보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른다는 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져 주지 않았는가. 

율법교사와 제사장, 레위인들의 행동하지 않는 지식과 고지식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가린다는 것을 깨닫자.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참사랑과 생명을 떠난 삶을 영위함으로써, 강도만난 이웃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는 것도 깨닫자. 그렇지 않으면, 복음(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을 세계만방에 전할 수 없디.  

그리스도인 모두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마음을 열고 상처받고 슬퍼하는 이웃이 어디에 있는가를, 눈을 크게 뜨고 주의를 살펴보자. 나의 일상적인 생활에만 관심을 두면, 하나님의 참사랑, 충만한 생명을 모르게 된다는 것을 깨닫자. 가정에만 켜 놓은 등불을 끄고, 밖을 바라보자.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한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맛보자. 

교회는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에 근거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고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언제나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교회,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교회가 되자. 자기들 안에 안주하는 교회는 닫혀진 교회이며, 죽은교회이고, 위선자들이 가득한 교회이다는 것을 깨닫자.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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