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놀라지 마세요
  내 부엌에는 물과 불이 있어요
  얼음과 숯불과 영하 20도와 영상 20도가 살아요
  58도의 독한 술과 13도의 순한 술이 있어요
  냉동고에는 치미는 분노와 살인적 치욕이 멈춘 채 정지되고
  세상에 새면 안되는 일급비밀이 급냉동되어 무표정하게 굳어 있고
  하나의 서랍엔 비상약이 수북하게 약 주인을 향해 위협적으로 수군거리고
  한 주먹 털어 넣으면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약이 밤마다 눈인사를 하고

  다섯 개의 칼이 번뜩거리며 용도를 기다리고
  한 방이면 돌도 깨어지는 쇠뭉치 방망이가 있고
  잘게잘게 찢을 수 있는 날선 가위가 세 개
  쇠구멍도 뚫을 수 있는 장비가 세 개

  이름도 예쁜 레몬에이드 주방 세제의 거품은 저를 닦진 못하고
  페녹시 에탄올 구연산 나트륨은 내 밥그릇에 얼룩을 남길 것 같고
  늘 물이 끓고 있어요
  어쩌다 기름이 끓기도 하지요 굵은소금이 슬쩍 쳐다봐요
  산 생선이 금방이라도 푹 익는 300도의 끓는 물
  가축 뼈를 밤새 우려내 그 물을 마시면서
  쌀도 푹 익혀 잘게잘게 씹어 먹는 내 부엌
  누르면 불이 되는 인덕션 옆에는 뼈도 가루가 되는 믹서기가 돌지만
  공포와 두려움은 없어요평화롭게 먹고 마시는 내 부엌

  이런 게 삶?
  전쟁 공부에서 많이 보았던 풍경?
  박수근 화백의 엽서 속 소가 보는 앞에서 소고길 잘게 다지는 도마 위 
  밥이 다 되면 전기솥에서 푸우욱 치솟는 연기가 
  극초음속 마하 10 탄도 미사일이라고 생각하는
  이 전쟁의 핵심은 오늘도 먹는 일
  먹을 걸 만드는 일
  밤늦도록 평화로운 공포 속
  어둠 내리면 붉은 태양 같은 따듯한 불이 켜지는 내 부엌

지면상 해설을 줄인다. 이 작품은 부엌이라는 국소적인 현장을 통해 삶 전체 양태를 말하고 있다. 부엌은 삶의 양면성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즉 인간 실존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고 있다. 한 폭에 삶의 치열성과 안식을 추구하는 희망의 본질을 동시에 보여준다. 죽은 사람 이외는 누구나 부엌이 필요하다. 즉 부엌은 축소된 전쟁터 같다. 동시에 부엌은 생명 유지를 위한 장소다. 투쟁과 안식이라는 상반성의 진리를 융합시켜 인간의 현존(現存)을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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