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근대 철학의 문호를 연 데카르트의 주장으로 그의 사상을 압축한다. 그의 뛰어난 수사와 영향력은 아류를 낳았다. 예컨대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Spinoza),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Pascal), “나는 저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Camus),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Derrida) 등등. 두 문장으로 이뤄진 짧지만 강력한 논리의 원류는 시편이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시 116:10). 성구는 원문의 순서를 살린 <개역한글>의 번역이다. 다른 번역들은 본문의 간명하고 확신에 찬 선언과 의미를 흩트려 놓았다. 단순한 고백에 뜻밖의 반전이 뒤따른다.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보통 위 제목처럼 운을 떼면 ‘주는 나의 구원, 나의 방패’(시 62:6; 89:26; 118:21), ‘주를 영원히 찬송하리라’(시 18:46; 22:22; 72:19) 등의 확신과 서원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곤경을 과감히 드러낸다. 아나(הנע)는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 압제, 수모 등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 그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신뢰를 확신한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믿음이다. 히브리어 ‘아만’(ןםא)은 흔히 ‘믿다’로 인식되지만 단순하지 않다. 히에로니무스는 ‘아만’을 경우에 따라 ‘피데스’(fides)와 ‘크레도’(credo)로 옮겼다. ‘피데스’는 신의, 정절로서 신앙의 자세와 태도다. 사유에 그치지 않고 끝까지 따르는 결단적 의지다. 좋은 예는 아론과 훌이 아말렉 전투에서 모세의 손을 ‘끝까지’ 붙든 것이다(출 17:12; 막 13:13). ‘크레도’는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로서 목표이며 심장처럼 항상 뛰게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반드시 지켜야할 교리나 신조’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공적인 문서를 크레도라고 칭한다. 크레도는 밀실에서 주고받는 비밀이 아니라 공공성에 뿌리를 둔다(14,18절). 피데스가 개인적이라면 크레도는 공공적이다(롬 10:10). 이제 믿음은 전제가 되며 동시에 목표다.

바울은 <70인역>을 인용하며(시 115:1)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선포한다. evpi,steusa dio. evla,lhsa (고후 4:13). <70인역>은 이 구절을 115편의 첫 구절로 삼는다. 예수를 살리신 이가 그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신다는 바울의 고백은 시편 116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시듯 장차 우리도 그리스도 앞에서 살리신다고 믿는다. 부활 신앙이다. 바울은 시인의 동일한 믿음을 언급하고 재차 확인한다.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kai. h`mei/j pisteu,omen( dio. kai. lalou/men). 시인의 고백과 바울의 설교는 단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나는 믿는다, 고로 말한다!(I believe, therefore I could say). 두 문장에 기독교 신학의 출발과 목표를 담았다. 즉 진정(sincerity)으로 시작하고 정진(devotion)으로 목표에 이른다. 

진정(眞正)이란 ‘순수한, 섞이지 않은, 정직한, 솔직한’ 등이 포함된다. 여기에 정직도 들어있다. 정직의 직(直)은 우회하지 않는다. 곧바로 간다. 물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러나 지름길은 직선이다. 어린 아이에게 진정은 직선이다. 정진(精進)은 ‘정성을 다해 노력하며 나아감’이라고 사전은 풀이한다. 헌신과 열정을 통한 성장과 발전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서 이루는 과정이다. 갓난아이의 부모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생명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 즉 부모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의 품에 안겨서 충분히 먹고 자며,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진정 또는 ‘진정성’이란 부모를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오로지 무한신뢰와 절대의존이 요구될 뿐이다. 그 동안 아이는 성장한다. 헌신적 정진이다. 

믿음과 신학의 두 바퀴 진정과 정진은 시인의 고백에 녹아있다. 그가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겪었도다’고 밝히자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인다. 고통과 불신에도 시인의 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 그럴수록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생각한다(12절).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야웨의 이름을 찬미하며 정진한다(13,17절). 시편 116은 보통 감사시로 분류되지만 저변의 하나님 신뢰를 헤아린다면 의지시로 봐야한다. 그렇기에 큰 고통 중에도(10절), 여전히 비방하는 사람들 앞에서도(11절)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확인하고 공개적으로 거듭 공표한다(14, 18절).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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