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신적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은 사회구성의 기초가 된다. 때문에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도 건강하고, 국가도, 인류도 건강하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인들의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다. 이런 가정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종교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을 뒤덮으면서, 가장 기초적인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가정의 권위가 금융()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 가정도 돈이 최고인 시대가 됐다.

오늘 우리사회는 돈 때문에 이웃을 살해한다. 부모를 살해하고 형제를 살해한다, 과거 고추장, 된장, 쌀을 훔쳐 먹고사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 재물에 눈이 멀어 부모형제, 이웃을 살해하는 시대가 됐다. 교회도 떠나는 교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웃교회 교인을 강탈하는 시대가 됐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한다. 사악한 인간들을 향해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계시다.

오늘 우리사회가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부모의 대표자적인 신적 권위를, 물욕과 소유욕, 지배욕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가정교육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부모의 잘못된 교육방법과 우리사회 최고의 가치를 금융()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정이나, 사회, 교회의 최고가치는 도덕과 윤리가 아니다. 금융()이 최고의 가치가 됐다. 오늘 우리사회와 가정, 교회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돈이 신이 되었다. 신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켰다.

돈이 없는 부모는 부모노릇을 할 수 없다. 한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부모의 대표자적 신적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는 부모의 신적권위는 돈 때문에 무너지고, 가정은 파괴되고 있다. 돈 앞에서는 도덕도, 윤리도 필요 없다. 성경의 진리도 필요 없다. 부모의 신적 권위를 교육해야 할 교회마저도, 재정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를 내세워 주일학교 어린이교육을 등한시 하는 것은 물론, 주일학교를 폐쇄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건강한 가정을 위한 어린이 교육현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의 기초현장이며, 돈덕과 윤리의 산교육현장인 가정교육도 무너지고 있다. 그 자리는 돈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렇다보니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부모의 신적권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고, 돈 때문에 부모와 자녀간의 단절되고, 사회는 나 혼자 사는 사회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오늘 우리사회는 너와 나, 그리고 그가 없다.

편법과 반칙이 통하는 세상을 구축한 그들(?)
부모,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신적인 권위

가정은 윤리도덕, 참사랑교육 현장

안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나의 마음에서 너와 그의 마음으로 흐르는 인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너를 죽여 내가 사는 사회가 됐다. 너의 교회를 희생시켜 내 교회가 성장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교회와 가정은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이단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인을 빼앗아 가는 이단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티끌은 전혀 들여다가 보지를 않고 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교회는 이단사이비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한국교회를 향해 신천지보다도 못한 교회라고 비판한다.

어린이의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다섯 번째 계명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어린이 교육과 부모공경의 교육을 책임져야 할 교회는 점점 사라지고, 대신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는 성공의 비결을 가르치는 교회만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학교교육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지 알 수 없어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서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만이 있고, ‘는 없다. “어린이의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속에는 하나님의 참사랑과 공동체성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단어의 원어는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이 계명은 동양에서 말하는 낳아 기른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이상의 뜻을 담고 있다. 부모와 자녀 간의 공동체성과 윤리·도덕의 교육, 하나님의 참사랑이 그대로 담겨 있다. 신명기 64-7절의 말씀은 이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이 성경말씀은 부모 된 자들의 첫 번째 의무이다. 전능하신 손으로 혹독한 파라오의 노예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업적을 자녀들에게 전해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를 통해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모는 야훼 하나님의 대언자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모를,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하라는 것이다.

편법과 반칙이 난무한 그들만의 세상

이 말씀은 아빠찬스’, ‘엄마찬스로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출세가도를 달리는 가정의 부모와 자녀들에게는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말이다. 오늘날 부모가 자녀들을 이 토대 위에서 우리의 과거 아픈 역사와 문화, 일본식민지 압제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참사랑을 교육했다면, 부모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 있는 대한민국의 부모는 이제 많은 재산을 만들어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유업이 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버렸다. 반칙과 편법으로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데 형안이 되어 있다. 교회도 아빠찬스를 이용해 좋은 교회, 담임목사 세습을 강해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 교회를 깊숙이 들여다가 보면,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 아버지 목사의 업적을 지우기에 바쁘다. 한마디 교회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목사가 적지 않다. 교회가 이러니 사회는 오죽하겠는가. 한국교회가 정치권력과 사회를 향해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 속에서 갈등을 부추기며, 국민적 분란을 일으킨다. 세상의 빛이 되었던 교회는 이제 국민들이 걱정하는 세태가 되었다.

더 이상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어머니의 아가페, 하나님의 참사랑을 교육하는 현장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는데,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는가. 모두가 내 안에 갇혀 살고 있다. 개방된 가정과 교회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보잘 것 없는 이웃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멀리하며, 업신여긴다. 이들을 자신의 출세와 부를 위해서 악용한다. 누가 이런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있겠는가. 교회 스스로 복음의 빛을 저버리고 있다.

효의 실천 건강한 가정의 토대

이 같은 모습은 과거정부의 장관후보와, 현 정부, 장관후보자들의 청문회장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 우리사회는 편법과 반칙 등으로 그들만을 위한 세상을 구축했다.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교회를 구축했다. 교회를 개방해 세상 사람들을 받아드릴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를 않다. 그렇다보니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아 떠난 교인의 빈자리를 채울 수밖에 없다. 이는 결등과 분열로 이어지고, 이단 및 사이비논쟁을 벌인다.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인간 사회의 혼란과 고통은 신이 원하는 질서를 파괴한데서 온다고 했다. 신이 창조한 세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로 빠진다는 애기다. 평신도 신학자인 허버트는 초자연적인 진리, 즉 계시종교도 부인 할 수 없지만 그것을 감지하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한 사람이나 가능하다. 계시적 종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제도화되고, 주요세력인 성직자들이 권력투쟁에 몰입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고 했다.

스미스와 허버트의 말은 오늘 편법과 반칙을 일삼는 교회의 목회자들을 향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성직자(목회자)들이 권력투쟁, 타락하는 사이 작은 교회들은 눈물을 흘리며, “헌금해 주고 전도해 주겠다고 제안하는 신천지교회와 교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 2000개의 작은 교회가 신천지교회와 말씀교류 MOU를 체결하고 있다는 말에 대해 그냥 지나칠 때가 아니다. 지난달 22일 워커힐 비스타홀에서 열린 신천지 말씀성회에 수도권 목회자 500명이 참석했다는 보도는 충격으로 다가오고도 남는다.

돈의 가치가 최고인 시대,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이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일가족이 이웃도 모르게 주검으로 발견되는 일이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알려지고 있다. 생명의 가치도 잃어버렸다. 생명의 가치와 중요성을 말하는 목회자도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 !!! 악마의 근전을 외치는 자들만 보인다. 모두가 생명은 죽음을 거부하고, 생명은 생명에 응답하고, 생명은 생명을 낳는다는 성경의 창조적 섭리를 망각했다.

이것은 모두가 부활과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가 하나님의 참사랑(복음=기쁜소식)의 교육부재에서 온 결과이다. 과거 한국교회는 가난했지만 성경말씀에 충실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웃을 향해 긍휼을 베풀었다. 닫힌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돌볼 겨를이 없다. 대신 바벨탑을 쌓은데 경쟁을 벌인다. 5월 가정의 달 어린이와 어르신들을 위한 작은 행사를 갖고, 교회의 사명을 완수 했다고 자화자찬하기에 바쁘다.

바벨탑을 쌓는 동안 생명은 주검으로

그래도 이런 교회는 다른 교회가 하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에 다행스럽다. 이것마저도 않는 교회들이 허다하다는데 안타깝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을 잃어버렸다. 소금의 맛도 잃어버렸다. 더 이상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 생명의 종교, 사랑의 종교, 용서의 종교, 화해의 종교가 아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했다면, 최소한 아파트 옥상에서 엄마와 어린자녀가 뛰어내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었을 것이다.

부모의 대표자적인 신적인 권위는 오래전에 땅에 떨어졌다. 경쟁사회에서 자녀를 아가페의 사랑, 하나님의 참사랑을 교육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교인들의 자녀들 중에 주일성수를 지키는 자녀가 몇 명이나 될까. 조용히 손을 가슴에 얹고 생각하면, 그 해답은 분명해 진다. 과거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주일날 부모와 함께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가족 전체가 한자리에 앉아서 가족예배 및 기도회를 드렸다.

하지만 현대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렇지 않다. “대학입시준비를 해야 한다”, “어머니·아버지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자녀인 나도 강제적으로 교회에 다녀야 하나”, “아버지가 목사이지 나는 목사가 아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등등의 이유를 내세워 예배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교회 공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의식을 갖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부모의 대표자적인 신적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보니 우리가정과 사회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이미 잃어버렸다. 특히 편법과 반칙으로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도이며, 자녀교육에 성공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여기에서 이탈하는 아이들은 비행청소년, 아니 나쁜 아이로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오늘 우리사회는 출세주의를 지향한 나머지, 하나님의 참사랑, 아가페의 교육현장이 실종됐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가정의 부부,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 드리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이혼율이 높아지고, 부모에 대한 효의 사상이 무너지고,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도 사라지고 있다. 이는 남편이 아내를,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형제가 형제를 살해하는 사건들이 매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기독교 가정은 더욱 심각하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부모도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사실 일부교회 목회자의 잘못된 가정에 대한 교육은 한국기독교를 효의 사상이 결여된 종교로 보는 편견을 갖게 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결여된 효의 사상에 대해서는 뒤돌아보지를 않고, 세상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본다고 불만 아닌 불만을 털어놓는다.

고난당한 부모 아픔 잊지 말라

이것은 일부 교인들의 실종된 효의 사상때문이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이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가정 전체가 효의 사상이 실종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사실 한국교회 만큼 를 강조하는 종교단체도 없다. 실종된 효의 사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대학원까지 생겼다.

기독교가 유교의 효의 사상보다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효는 유교에서 말하는 낳아 기른 부모를 공경하라는 뜻을 뛰어 넘는다. 일부교회는 제5계명에 근거해서, 교인들에게 효의 사상을 교육하기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노인대학을 비롯한 경로잔치, 독거노인 및 조손가정 반찬배달, 효도관광, 노인시설 운영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마저도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이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이 창궐한 이후 5월 가정의 달 어르신들을 위한 프로그램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이다. 교회 내 어르신들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 예배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보니 어르신들의 삶은 외로울 수밖에 없고, 외로움의 깊이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또한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과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 역시 교회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자치를 감추었다.

어르신 위한 프로그램 어디로(?)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교회의 어르신들을 위한 교회선교 프로그램은 교회성장의 토대가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인 할 수 없다. 효의 사상이 실종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5월이면 한국교회 안에서 쏟아지던 어르신들을 위한 노인잔치, 노인대학, 어르신 관광 등의 프로그램이 점점 자치를 감추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교인들의 제5계명 교육실천현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애기다.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이 율법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고난당했던 역사, 부모를 생각하며, 하나님과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날도 부모의 권위를 하나으로부터 위임받은 부모 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듯 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를 갈망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도 일제의 압제 밑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 부모와 조부모들의 고난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 한일 관계를 보면, 일본의 악행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인, 후구시마 방사능 오염수를 바리겠다는 저들의 악행을 깊숙이 들여다가 보고, 강력하고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를 바라만 보면서, 침묵하는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민족 앞에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의 대표자로 가정에는 부모, 학교에는 교사, 교회에는 교역자, 국가에는 통치자, 기관에는 책임자를 세웠다. 그리고 효율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부모의 대표자적 권위는 신적인 권위이며, 물리적 힘에 의해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다. 또 이 권위를 무너뜨리거나 도전하면 큰 죄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모든 부모는 주안에서의 권한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건강한 가정의 토대를 말하고 있다.

의인이 아버지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언 23:24~25)”,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로새 3: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1)”,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태복음 19:19)”,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레위기 19:3)”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