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탈무드의 이야기 한 토막. 하나님의 아들 넷이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할 때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첫째는 묵묵히 따른다. 둘째는 기도하며 회개한다. 셋째는 반항하며 따진다. 넷째는 자신의 잘못을 샅샅이 찾아내 엄격하게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차례로 아브라함, 히스기야, 그리고 욥이다. 그럼 넷째 아들은? 

시편 26의 2절에는 살피다(ןחב), 시험하다(הסנ), 단련하다(ףרצ) 등 세 동사가 연거푸 나온다. 영어 성경에는 examine, prove, try 등으로 번역되었다. 사전적인 의미로 풀면 ‘조사하다, 분석하다, 제련하다’는 뜻이다. 세 동사의 공통점은 곧 ‘시험’과 관련된 동사라는 점이다. 첫 동사는 마치 요셉이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사하라는 시험이고(창 42:15), 두 번째는 스바 여왕이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의 지혜를 검증하듯 푸는 시험이며(왕상 10:1), 그리고 마지막은 맹렬한 풀무불에 광석을 제련하듯 단련시키다는 뜻이다(렘 6:29, 시 66:10, 사 1:25). 흥미롭게도 카이로 거니자 사본은 세 번째 동사의 명령형을 커레(口語)와 커티브(文語)로 나란히 기록하여 그 의미를 강조한다. 연속된 세 동사는 (철저하게 실험하여) 빠짐없이 살피고, (나누고 쪼개어) 입증하며, (불순물을 정제하듯) 거르고 또 걸러내라는 뜻이다. 마치 예언자 에스겔이 금은보석에 뛰어난 지식을 보듯(겔 1:26, 27:12-24, 28:13) 시인은 광물의 정제과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단계마다 꿰뚫어보고 있다. 

세 동사의 목적어에 약간 차이가 드러난다. 처음 두 동사의 목적어는 시인이나, 세 번째는 ‘콩팥과 염통’이다. KJV와 TANAK는 ‘콩팥(kidney)과 염통(heart),’ ‘가슴과 심장’으로 직역하였지만, <개역개정>과 NRSV 등은 ‘뜻과 양심,’ ‘heart and mind,’ ‘생각과 마음’ 등으로 의역한다. 구약성서에서 콩팥과 염통은 곧잘 정직이나 양심에 비견된다. 해부학에 뛰어난 랍비들은 콩팥과 염통이 신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 의하면 신장은 정서와 감정의 영역이고, 심장은 양심과 지성의 공간을 상징한다. 이런 히브리 전통은 콩팥과 염통을 ‘심장, 마음, 폐부, 양심, 가슴’ 등 서로 분간 없이 쓰이기도 한다(시 7:9, 렘 17:10).

처음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죄과보다 엄중한 징벌을 원한 넷째는 누구일까? 그는 시편 26의 시인 다윗이다. 랍비들은 시편 26의 2절을 들어 다윗의 반응이 하나님을 가장 흐뭇하게 했다고 주석한다.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더욱 뜨겁게 하여] 달구십시오.” 다음과 같은 추가 해설이 뒤따른다. 

하나님, 왜 채찍을 뒤에 두십니까? 

저 채찍으로 나를 더 세게 내려치시고 내가 저지른 죄를 깨끗케 씻으소서.(Midrash Psalm 26) 

다윗은 자신의 과오보다 더 큰 형벌과 심판을 받겠다고 하나님께 요구한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 히스기야, 욥보다 다윗의 태도가 신앙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 평가받은 것이다.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둔 해석인지 명백하지 않으나 시편 51의 3절과 5절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실로,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새번역> 다윗은 자신이 알지 못한 죄악과 잘못까지도 숨기지 않고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나바호(Navajo) 부족은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등지에 사는 인디언이다. 그들의 지혜 중 양심 이해가 상당히 독특하다. 사람은 ∆형 심장을 가지고 태어난다. 양심에 어긋나거나 부정직한 일을 저지르면 심장의 삼각 모서리가 돌면서 양심을 찌른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일생동안 반복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의 모서리는 점차 마모되고 둔해진다. 그리하여 나이가 들면 ∆의 심장이 닳아 마침내 ○가 된다. 

하나님이 시인을 이렇듯 살피고 시험하며 단련하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시인의 두 발을 ‘정직한 양심’ 위에 세워주시려는 것이다(12절). 히브리어(רושׁימב)는 ‘선 자리’나 ‘평탄한 곳’으로 번역되어 물리적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도덕적 완전과 정직’이다. 하트 ♡로 표시할 수 있을까. 심장의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동작을 형상화한 모습이다.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심장은 단 한 순간도 박동을 멈추질 않는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한 순간도 눈에서 떼지 않는 것처럼. “주님, 이제 나는 정직하게 서 있다가 예배 중 하나님께 엎드립니다”(12절 사역). 시인이 깨달은 회개이며 고백이다. 하나님의 연단과 단련과 시험은 ♡처럼 힘차게 뛰는 도덕과 정직을 갈망하는 화답이자 찬미이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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