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병사들이 고지를 향하여 돌격하고 있다. 빗발치는 탄막(彈幕)을 뚫고 병사들은 전진한다. 포복하다가는 다시 일어나서 뛰고 또 엎드리고 적의 기총소사를 피한다. 여기에 대학 동창으로서 함께 출전한 두 학도병도 한몫 끼어 있다. 그들도 고지를 향해서 헐떡이며 기어오르고 있다. 때마침 적군의 총구가 앞을 달려오는 학도병 A의 가슴을 겨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런데 그 위험한 순간에도 학도병 A는 이미 땅에 엎드리고 그 대신 뒤따라오던 학도병 B가 공교롭게도 그 운명의 총탄을 가슴에 받고 쓰러진다.

훗날 학도병 B가 국군묘지에 묻혀 무명용사로서 잠이 들어 버리지만, 학도병 A는 훈장을 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숱한 죽음 속에서 운명적으로 살아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는 그 유명한 전투에서 얻은 훈장으로 명예로운 제대군인이 되어 그날의 전투 담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며 기뻐할 뿐만 아니라, B만을 좋아하던 아가씨는 A의 품에 안기게 된다. 온갖 행복이 모두 A에게도 돌아가 버리고 불행은 모두 B에게로 만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있을 수 있는 짤막한 삽화(揷畫)를 소개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우리 인간의 아주 아이로니컬(Ironical)한 운명이 나타나 있다. A를 노렸던 총탄이 B의 가슴을 뚫은 것은 전혀 우발적인 일이다. 총탄은 A를 노렸던 것이며, 또 A 자신도 그 총구를 미리 알고 피하려 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딴 사람에게로 적중되고 그로 말미암아 B는 A가 차지했던 여인마저도 이제는 쉽게 자기 것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 이렇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어디까지나 운명의 장난이지 그 어느 쪽도 스스로 행복을 선택하고 또 그것을 버린 것은 아니잖을까?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했다.

「참된 작가에게 있어서는 모든 작품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면 작가들은 달성되지 않는 어떤 것을 향해서 다시 경험을 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결코 행해진 일이 없는 것을 위해서 또는 남들이 해봤지만 실패한 것을 위해서 항상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문학 작품을 두고 한 말이지만 인생도 마찬가지다. 굳이 작가와 같은 창조적인 작업이 싫다는 사람에겐 물론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참된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소중한 충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참된 행복이라는 것은 평범한 생활 속에서는 얻어질 수가 없다. 참된 행복은 물질적인 욕망에의 충족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신적 오락물만으로 참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좀 더 고차원(高次元)의 행복을 갈망하는 사람은 창조적인 작업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광학적인 연구, 심오한 진리의 탐구, 거룩한 종교에의 헌신, 사회 발전을 위한 위대한 정치적인 활동 등 얼마든지 창조적인 작업은 많다. 이러한 생활에서 참된 행복의 감각을 가져보게 되는 사람은 모두 평범을 떠난 사람들이다.

결국, 인생이란 실험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쟁터처럼 극단적인 운명의 실험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에겐 실험실이 필요하다. 실험실이란 처음부터 어떤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여러 번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거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비록 쓰디쓴 실패를 경험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고 말단 인간으로 평생을 허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고 말단 인간을 평생을 허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용사만이 소유하고 있는 아름다운 상이훈장(傷痍勳章) 이거를 이것 역시 어찌 영광이 아닐 수 있으랴!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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