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시편 17은 의인의 기도다.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 호소하며 원수들에게서 보호와 구원을 요청한다. 시인이 고대하는 구원의 뿌리는 놀랍게도 오랜 기억 속의 출애굽 사건이다. 이 시편의 7-8절이 유독 바다의 노래를 닮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출 15:11-13).

‘출애굽’에 대한 또렷한 기억은 대대로 전승된 믿음이다.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눈앞의 부조리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공평이 실현되기를 간구한다. 그런가하면 8절의 ‘눈동자’와 ‘주의 날개’는 모세의 노래(신 32:10-11)와 평행을 이루면서 광야의 시련 가운데서 경험한 하나님의 보호를 계약적 언어로 묘사한다. 특이하게도 이 과정에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신체 부위가 여러 차례 언급된다. 귀, 눈, 입술, 오른손, 눈동자, 날개(?), 얼굴 등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귀’에 호소하고(1,6절), ‘눈’을 마주하며(2,8절),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4절), 끝내는 ‘얼굴’을(15절) 대한다. 시인의 호소가 귀와 눈에 전달되면 하나님은 오른손으로 그를 구원하시고 마침내 주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원수로부터 보호이며 또한 최종적인 구원이다. 드디어 시인은 ‘떳떳하게 주님을 보며’ 흡족해한다(15절).

‘눈’과 연관되어 ‘주의 눈’(2절), ‘눈동자 같이’(8절)로 한 번 씩 나온다. 눈(ןיע)과 눈동자(ןושׁיא)의 차이는 뚜렷하다. 후자는 눈의 어두운 부분이고, 전자는 전체를 가리킨다. 이스라엘과 구약에서 눈과 눈동자의 상징은 사뭇 다르다. 곧 하나님의 눈이 공평과 정의에 맞춰진다면, 눈동자는 보호와 안전이다(애 2:18; 슥 2:8). 눈동자와 관련된 히브리어 이숀(ןושׁיא)은 본래 학생들의 반짝이는 ‘동그란 눈’이나 ‘가장 깜깜한 한 밤중’을 뜻할 때 쓰였다(신 32:10; 잠 7:2; 20:20). 흥미롭게도 영어 번역은 ‘내 눈의 사과’(the apple of my eye)다. 마치 ‘내 눈의 콩깍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와 같은 관용어로 자리 잡았다. 

랍비들의 눈과 눈동자의 구별과 관점은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하나님은 왜 좁은 눈동자를 통해서 사물을 보게 만든 것일까? 사람의 눈에서 흰자위는 넓고 검은자위는 좁다. 그런데 정작 대상을 볼 때는 눈동자의 검은자위 중에서도 홍채로 둘러싸인 ‘동공’을 통한다. 눈에서 가장 어둡다. 그것은 인생이란 어두운 것을 통해서 밝은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탈무드는 설명한다. 그래야 (근거 없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자만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랑드르파의 대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는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Septem Peccata Capitalia)의 한 가운데 인간의 운명과 죄악을 꿰뚫어 보는 ‘그리스도의 눈’을 배치하였다. <7 가지 죄는 분노, 교만, 음욕, 나태, 폭식, 질투 등이다.> 화가는 동그란 탁자에 일곱 가지 죄악을 묘사하고 네 모서리에 인간의 네 가지 운명, ‘죽음, 심판, 천국, 그리고 지옥’을 그렸다. 관람자의 시선은 중심으로 모아진다. 곧 <하나님의 눈>이다. 그 가운데 눈동자는 십자가를 배경으로 예수가 창에 찔린 자신의 상처를 만지며 서 있다. 그리고 빗살무늬 경계에 네 마디 라틴어를 새겼다. Cave Cave Deus Videt (조심하라 조심하라 하나님이 지켜보신다). 보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눈동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죄악을 감찰하신다. 그러나 시편 17의 시인에게 하나님의 ‘눈동자’는 보호와 안도이며 만족과 구원이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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