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70-80년대 성장의 꿈서 벗어나라

본지는 가정의 달을 맞아 <저출산, 교회소멸· 마지막골든타임>에 이른 한국교회를 진단했다. 이어 초저출산의 상황서 교회의 역할과 해야 할 일을 알아봤다. 초저출산 국가, 국가·교회소멸의 위기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극명하다. 어린이주일학교 소멸위기에서 교회역할 또한 중요하다. 모든 교회가 교회소멸에 대해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헌데 교회성장의 기초인 주일학교 소멸에 대해서는 위기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그것은 교회 모두가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 들여져 많은 재정을 삼켜버리는 어린이 주일학교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회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린이 주일학교가 절실하지 않다. 여기에 들어가는 경비를 다른 곳으로 돌려, 눈에 보이는 효과를 내는 것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얄팍한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열심히 전도하고 목회하면, 70-80년대 교회성장의 해가 다시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오늘 목회자들이 성령집회에 관심을 갖고, 저극 참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혹여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겠는 계산은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아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욕심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실제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아 성장시킨 교회의 주변교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중대형교회 떠난 교인의 빈자리를 이웃교회 교인을 빼앗아 채운 중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전도해서 양육한 교인을 뻬앗겨 눈물 흘리는 작은 교회 목회자의 눈물을 생각해 보았는가.

이런저런 연유로 지난 3년 동안 1만여개의 작은 교회가 문을 닫았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들 교회 중 일부는 이웃 대형교회에 흡수됐고, 일부 교회는 이웃교회와 통폐합됐고, 일부교회는 스스로 소멸됐다. 이제 한국교회는 새로운 교인을 교회로 전도해 성장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웃교회 교인을 빼앗지 않고서는 교회가 성장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 했다. 한국교회는 이 같은 문제를 30년 전에 기독교신문을 비롯한 기독교연합신문, 기독교방송 등 기독교 각 매체들이 이를 예견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여성들의 정서적 안정 위한 제도적 장치 절실
정부와 지자체
, 교회가 함께하는 시스템구축도

70-80년대 성장의 꿈에서 벗어나라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이 멈추면서, 교회들이 대형버스를 돌리는 등 교인쟁탈전을 벌였다. 한마디로 대형교회들은 버스를 작은 교회 앞에 세워놓고 교인을 모셔가는 촌극이 벌어졌다. 것이 바로 당시 대형교회들이 제시한 교회성장 프로그램이다. 90년대까지 이같은 교회성장 프로그램들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성행했다. 오늘날은 이마저도 사라졌다. 심지어 일부 중대형교회 목회자는 교인을 빼앗기는 교회가 잘못이다고 오히려 작은교회를 나무란다. 1990년도부터 한국교회는 쇠락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저출산으로 인해 교회성장의 기초가 되는 어린이주일학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함께 교회도 소멸되어 가고, 교회는 고령화 되어 가고 있다. 젊은 교인이 사라지면서, 주일학교 교사 수급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늘 현장 목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들은 70-80년대 한국교회가 어떠한 일을 하면서, 성장했는가를 되돌아보고,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이유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맞벌이부부와 가난한가정의 자녀들을 돌봐주기 위해 대부분의 교회가 어린이선교원을 운영하거나, 또 부유한 교회들은 유치원을 운영, 교회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어린이선교원과 유치원은 지역사회 주민들과 교회와의 가교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는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이렇게 교회가 지역사회의 문제해결에 적극 동참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이 교회에 기대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삶을 누렸다.

교회공간을 탁아소 등으로 개방하라

뿐만 아니라, 선교원과 유치원을 다닌 어린이들이 대부분 교회로 흡수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린이 주일학교가 왕성했던 것도 선교원과 유치원의 역할이 컸다. 선교원과 유치원은 교회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지역사회 미취학 아동들을 돌봐주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교육과 참사랑을 실현하는 교회 부속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가난한 맞벌이부부들은 마음 놓고 아이를 선교원과 유치원에 맡겼던 당시를 기억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추억이 아니다. 당시의 구체적인 어린이 선교전략이었다.

교회의 선교원과 유치원은 어린이 돌봄의 역할을 국가를 대신해서 교회가 감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많은 교회들이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 재정은 교회건축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일부 교회는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을 악용해 문제를 일으킨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70-80년대 교회성장이 지역사회를 떠나 그냥 성장했다는 생각은 한마디로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들이 어린이 선교를 위해서 그만큼 시간과 재정, 인적자원을 투자한 결과이다. 이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 쇄신은 물론, 교회성장의 신선한 방향을 일으켰다.

그 이전인 선교초기, 일제 36, 해방, 6.25한국전쟁 당시를 돌아봐도 한국교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어린이주일학교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재정을 투자했다. 그것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국가와 교회의 미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린이주일학교 투자는 미래 교회성장의 토대가 되고, 어린이 신앙교육을 교회가 책임진다는 의미가 있었다. “어린 시절 성탄절 날 교회에서 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서 교회에 나갔다는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당시 교회가 어린이 주일학교에 대해서 얼마만큼 관심을 가졌는가를 한 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교회성장의 토대가 됐다. 왕성했던 어린이주일학교는 60년대를 거쳐 70-80년대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60대 이상의 어르신 대부분은 과거 교회에 한번 이상 나갔다고 술회한다. 이런 어린이주일학교가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함께 쇠퇴의 길을 걸어 왔고, 걷고 있다. 일부교회의 주일학교는 이미 소멸됐다. 이제 한국사회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과자를 먹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다.

때문에 교회도 사회와 가정이 변화되어가는 만큼, 교회, 특히 어린이 주일학교도 변화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변화된 시대적 상황에 따른 목회계획을 수립하고, 어린이 선교전략을 세워야 한다. 사실 1990년대까지 각 단체마다 열던 어린이캠프 등 어린이전도프로그램은 자취를 감춘지 이미 오래되었다. 여기에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90년대 초까지 성행했던 어린이선교원을 운영하고 있는 교회는 이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유치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이 돌봄 서비스 위해 교회 개방해야

간혹 재정이 넉넉한 도시교회에서 어린이를 위한 영어학교 등을 운영하는 교회는 간간히 보인다. 또한 일부 작은 교회에서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방과 후 교실을 어린이교육선교 차원에서 운영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이들 교회의 경우는 이러한 어린이선교정책으로 인해 주일학교가 그런대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초저출산에도 주일학교가 근근히 명맥을 유지되고 있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한국교화의 NG세대를 위한 선교정책이 왕성한 것도 아니다. 한국교회의 중등부는 기회주의적 교육에 길들여져 입시시험을 핑계로 교회출석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목회자·장로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MG세대를 위한 신앙훈련프로그램을 이들에게 맞게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간혹 일부교회에서 MG세대를 위한 선교정책을 내놓기는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 점점 고령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교회 목회자 수천명이 젊은 교인이 대부분인 신천지를 비판하면서도, 신천지의 말씀교류에 참여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들 목회자는 신천지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신천지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자신들이 신천지 말씀교류에 참여하는 정당성을 설명한다.

교회는 맞벌이 부부의 자녀를 돌볼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어린이 양육을 경험한 인적자원이 그 어느 종교단체보다도 풍부하다. 시스템만 잘 갖추면 일정한 돌봄 비용을 부모로부터 받고, 아이를 맡아 돌봐줄 수 있다. 또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도 받을 수 있다. 과거 교회가 선교원을 운영했듯이, 교회마다 탁아소 또는 어린이집을 운영, 젊은이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노늘날 교회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가정은 아가페를 교육하고 실현하는 기초가 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아가페를 실현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결혼한 부부는 생명을 실어 나르는 통로이다. 생명은 죽음을 거부한다. 생명에 응답한다. 생명은 생명을 잉태한다. 때문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 생명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교회가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산물인 맘몬()에 길들여져 생명을 거부하고,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생명을 실어 나르는 통로인 결혼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결혼 나이도 크게 늘어났다. 그것은 2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비율이 크게 줄어든데 반해, 30대 후반, 40대에 아이를 낳는 여성이 크게 늘어났다는 정부의 통계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소멸되는 지방자치단체, 소멸되는 교회와 학교는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 경상북도 영양군은 한때 7만명의 인구가 16천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영양군은 전국 228개 기초단체 중 울릉군(9000) 다음으로 인구가 적다. 지난해 영양군은 사망자가 295명인데 반해 출생아는 32명으로 사망자의 10.8% 수준이다. 이는 오늘 대한민국 오지 기초단체가 소멸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으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인구가 감소하는 영양군에는 소아과 병원 하나 없다. 돈이 안 되는데 누가 이곳에 병원을 개원하겠는가. 여기에다 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등 4대 시중은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시회·국가 한마음으로 대책 강구하라

그 흔한 이디야, 스타벅스 등 국내 10대 커피 프랜차이즈 점포도 하나 없다. 한마디로 인구감소-인프라 감소-인구 감소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 교회 소멸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초저출산이 국가의 문제를 떠나 지자체의 문제, 교회의 문제가 됐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모두가 위기의식을 갖고, 초저출산문제에 대응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것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정부나, 지자체, 여성단체들이 내놓은 출산정책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초저출산의 문제는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와 지자체, 사회, 종교단체들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공동으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여 한다. 특히 교회는 아이를 양육해 본 경험 많은 인적자원과 안전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탁아소 및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오늘 우리사회는 인간을

사랑하지 못해 짐승을 사랑하는 세태가 됐다.

아담은 많은 짐승이 있었지만, 자신의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 생각한 하나님은 아담이 잠자는 사이 갈비뼈를 취해 여자 하와를 창조했다. 아담은 아와를 보자 내 짝이 나타났구나, 내 뼈 중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며 춤을 추지 않았는가. 성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아들과 딸을 낳아 번성하라고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위대한 창조적 선물이다.

탁아소, 어린이집은 과거 한국교회가 어린이선교원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탁아소에 맡겨진 아이를 매개로 지역주민과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어린이주일학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교회성장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 초저출산문제는 탁상공론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교회는 교인이 감소한다”, “어린이가 없어 주일학교를 운영 할 수 없다고 볼멘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교회가 오늘의 초저출산의 상황서 최소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행동해야 한다. 70-80년대 십자가만 세우면, 교인이 몰려왔던 장밋빛에서 헤어나지 않고서는 교회는 희망이 없다.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을 열수도 없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한국교회의 어린이주일학교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개개인이 행복하지 않은데, 엄마·아빠찬스로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한 오늘의 상황서 누가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기를 수 있겠는가. 오늘 대한민국은 청년이 살기 힘든 사회이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결혼을 낳지 않아도, 혼자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돈만 있으면 된다.

탁상공론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는 한마디로 희망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년들을 위한 복지혜택이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청년들이 돈만 삼켜 버리는 경쟁사회, 아빠찬스와 엄마찬스로 그들만의 사회를 구축하는 사회, 반칙이 판을 치는 사회구조 속에서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자신이 없다는 것이 신혼부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그렇다보니 청년들은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 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분명 청년들은 실업, 주거, 출산,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 청년 대부분이 도심에 몰려 있다. 수도권에 청년 55%가 몰려 있다는 통계도 있다. 그렇다보니 지방은 청년이 없을 수밖에 없다. 영양군과 같이 1년에 한 학급도 안 되는 아이가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역의 청년들의 생활이 빈곤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은 물론, 지방 지자체의 소멸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정부의 육아휴직 등 쉴 권리가 제도적으로 충분하지 않다. 남자와 여자가 유가휴직에 있어 평등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지수는 OECD 국가중 59위로 맨 꼴찌이다. 여성의 경력단절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도 필요하다. 여성근로자가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평등에 근거한 임금격차를 줄이는 등 사회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사회적 합의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기성세대의 양보도 절실하다. 초저출산문제는 공동체 모두의 문제이며,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이다. 스위스와 같이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 다니는 노동자의 임금이 비슷해야 한다. 한마디로 구조적인 문제 중 하나인 사회복지시스템이 변화되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결혼해서 생명을 실어 나르면, 국가와 교회는 생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모두가 초저출산시대야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애기다.

교회도 생명의 소중함과 결혼이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적선물이라는 성경속의 진리를 젊은 청년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그리고 가정은 아가페를 실현하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는 신앙공동체라는 것도 교육해야 한다. 이 정도는 해야 교회가 대한민국에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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