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성 교수
그런데 로마 교회의 감독이 세계 교회를 지도하고 판정하는 자리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동방정교회가 강력히 거부하여 분리하게 되었다. 로마 교회에서는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던 사도행전 15장과 16장의 결정에 위배되는 다른 전통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4세기 제롬이 밝혀놓은 바에 따르면, 각 지역 교회에서 목회와 설교를 담당하지 않는 행정적인 감독이 대표권을 행사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고 하였다. 지역 교회에서 회의를 갖고 사회자를 세울 때에, 사도시대에는 감독이나 장로가 상호 동등한 지위를 가졌었는데, 점점 감독제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주후 376년,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밀라노 감독 암브로스는 장로들과 감독들에 의해서 치리되던 초대교회의 제도를 선명하게 풀이한 바 있다:

“모든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진 후에, 직분자들이 임직되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편지에서는 오늘의 교회구조 에 일치하지 않은 내용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편지들은 교회의 첫 시작이 있던  때에 기록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동료 장로이자 감독으로 세웠는데, 이전에는 직분자를 모두 장로라고 불렀다.”

단 한사람의 감독 하에 치리를 받는 정치적 통일성이란 아예 교회가 시작되던 초대교회 시대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점은 얼마 전에 물러난 교황 베네딕트가 교황청 교리장관으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서 대표자로 일할 때에 인정한 것이고, 동방정교회 신학자 지지우라스도 역시 장로제도가 최초의 교회 정치제도였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다.

로마 교회의 감독이 사도적 계승자로서 통일성을 대표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 시대에 사도들이 각 지역에서 교회를 세워나가던 설립초기에는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2. 교단과 교파들의 분열

현대 교회가 이처럼 다양하고,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슨 교회의 통일성, 혹은 하나됨을 말할 수 있는가고 반문하게 된다. 특히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로, 서로 다른 그룹들이 존재하게 되면서, 마치 통일성을 상실케 한 근원이 바로 개신교회에 있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종교개혁자로부터 나온 개신교회가 교회의 통일성을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는가?

독일 루터파 교회에서는 교회의 구조와 정치체제에 대해서 각 지역교회별로 자유함을 누리도록 허용하였다. 교회의 정치제도는 어느 쪽으로 해도 무방하다는 “아디아포라” (things indifferent) 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다. 엄격한 상하구조에서부터, 개교회의 독립성을 내세우는 내용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다.

요한 칼빈은 종교개혁이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을 분리시켰다는 비난을 거부하였다. “야고보 샤돌레에게 보내는 답변서” (1539년) 에서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근간이며, 끈이라고 반박했다. 그리스도의 통일성이란 항상 성령의 통일되게 하시는 역사 가운데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의 통일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기독교 단체가 등장하여서 혼란을 초래했다. 영국에서 국가교회 체제인 성공회의 감독제를 거부하는 분파적인 독립교회, 분리주의자들, 개교회를 단독적으로 운영하는 회중교회 체제가 17세기 초엽에 나타났다.

독일과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여 분리된 ‘재세례파’에서는 감독의 직책을 중심에 두었다. 독일 경건주의자들도 루터파의 감독제 입장을 채택했다. 급진적인 경건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그 어떤 직분자도 허용하지 않은 퀘이커파와 형제교회들과는 약간 달랐다. 개신교 출범 이후에 통일성에 대한 논쟁이 가속화 되었다.

3. 에큐메니컬 운동

교회의 통일성을 눈에 보이는 제도적으로, 혹은 세계 교회들이 정치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우선 순위에 올려놓은 모임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세계교회 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 W.C.C.)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교회들을 망라하여 통일성을 표방하는 ‘에큐메니칼 운동’ (교회일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출발점은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들이 각각 다양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관계성을 유지해서 통일을 이뤄보자는 것이었다.

WCC가 표어로 내세운 요한복음 17장 21절은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라는 구절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교통을 성명하는 요한복음 17장에 대해서는 충분한 고찰과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17장에서 가장 깊이 다루어지고 있는 핵심은 성도들 사이의 통일과 하나됨의 근거가 되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교통과 하나됨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 안에서 하나됨이다 (요 17:17,19). 지상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해서 포용주의자들이 되어서 어떤 신학적인 해석들이라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WCC는 교회의 통일성보다는 교단간의 화해를 새로운 개념으로 제시했다. 교회의 사회적,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하여서 서로 화해와 협력을 하자는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교회가 추구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이라는 신학적인 본질은 거론하지 말라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61년 이후로, WCC는 세계 전체 교회만의 일치가 아니라, 세상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입장으로 확장되었다. 세상의 일들이 교회의 우선 사역으로 흡수되었다. 이런 경향을 세속적인 에큐메니즘이라고 부른다. 상당히 포용적인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서에는 몰트만의 “자유 가운데 일치”라는 사상이 담겨 있는데, 이것은 세상을 향해서 열려있는 것이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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