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섬기는 사람, 세상의 종이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2)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3)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15-23)

인간은 누구나 자식, , 직장, 권력, 자기고집, 사상, 등에 얽매여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요즘 정치권을 깊숙이 들여다가 보면, 힘을 가진 자에게 얽매여 살아가는 군상들을 본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총선 출마예정자들의 모습을 보면, 정치에 얽매여 사는 사람, 힘 있는 자에게 얽매여 사는 군상들의 모습은 가관이 아니다. 이들은 분명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세상의 종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섬기는 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완성된 존재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성화된 길에 들어선 사람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는 완성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모두의 마음에 욕망과 탐욕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지배욕과 소유욕이 강해 맘몬을 사랑하며, 바벨탑을 쌓기에 바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보니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는 혼란과 고통이 연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질서와 교회의 질서에 균열이 크게 생기고 있다. 인간들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의 자리는 맘몬’()으로 대치되고 있다. 신의 자리가 인간들의 탐욕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중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삶 전체가 천상을 향한 삶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생활 등 모두가 종교에 예속되어 있었다. 인간의 삶은 천상을 향한 삶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드릴 때 구원의 역사가 시작
미래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미래 희망·구원 약속

인간의 감각까지 대신하는 AI시대 도래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의 인간의 삶은 천상을 향한 삶을 추구하면서, 지상에서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보니 인간 모두는 마음속에 내제된 욕망과 탐욕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중세시대의 인간들은 천상의 삶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교회가 썩어 문 들어지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루터는 천상의 삶도 중요하지만, 지상의 삶도 천상의 삶 못지않게 중요하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천상의 삶보다도, 지상의 삶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며, 세상과 결탁하는 한국교회야 말로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이다. 오늘 곳곳에서 이단자 및 교주가 나타나고, 이단연구가들이 나타나 진리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서 종교개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몇 해 전 한국교회 곳곳에서 이 같은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그렇다보니 인간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기대어 살아가지를 못한다. 세속에 기대어 살면서 맘몬을 노래하고 바벨탑을 쌓는다. 오늘 인간사회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인간의 감각까지 대신하는 AI, 즉 인공지능시대가 도래했다.

한마디로 집안에 기계를 하나 사다가 놓고 대화하는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얘기다. 인간의 감각과 감정, 애정까지도 기계가 대신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생명을 실어 나르는 사랑도 기계가 대신한다. 이러한 기구를 판매하는 가계도 눈에 띌 정도로 많아졌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었고, 많은 동물을 창조했다. 아담은 이 많은 동물 중에서 자신의 짝을 찾지 못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하나님은 아담이 잠자는 사이 갈비뼈를 취해 하와를 창조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 내 살 중에 살이요, 내 뼈 중에 뼈라며 기뻐했다. 한마디로 어떠한 것으로도 인간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교육하는 것으로, 오늘날 인간을 사랑하지 못해 짐승을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텔레비전 등 언론에서는 인간을 사랑하지 못해 짐승을 사랑하는 유명인사들의 모습만을 비춰준다. 이것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인간들은 아이는 낳지 않아도 강하지 한 마리 정도는 함께 생활한다. 그것도 사람은 배신해도, 강아지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강아지와 함께 생활한다. 그러다가 싫증나면 내다가 버린다. 젊은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겠는가.

부모는 늙고 아프면 내다가 버리지만, 강아지는 그렇지 않다. 수 백 만원을 들여 수술을 해 준다. 모두가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짐승을 사랑한 결과이다. 이제 이 사회는 강아지 천국이 되어버렸다. 난폭한 강아지는 인간과 똑같이 힘없는 사람을 공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다. 이런 연유로 이 땅에 초저출산시대가 도래했다.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며, 생명을 실어 나르는 결혼을 기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모두가 생명은 생명을 낳고, 생명에 응답하고, 죽음을 거부한다는 진리를 상실했다. 인구의 감소로 지방자치단체도, 교회도 소멸위기에 직면했다.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 부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인간 모두가 나만 편하고, 잘살면 된다는 개인이기주의, 출세주의가 이 땅을 죽음의 땅, 비정한 사회로 만들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간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101-8절은 하나님은 절망적인 인간의 삶에서 자녀를 낳아 인간의 미래를 열어준다고 교육한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 우주여행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질은 전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인간들은 자신의 복제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의 DNA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다보니 인간들 사이에서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편법과 반칙만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웃을 존중할 줄도 모른다.

기독교 역시 이웃종교, 이웃교회를 인정할 줄을 모른다. 나의 마음을 열어 너와 그를 받아드릴 아량이 없다. 너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 세상이 됐다. 그렇다보니 오늘날 인간사회는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끼리끼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고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며, 자매라고 말한다. 허공을 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가식적이다. 이로 인해 인간사회는 혼란과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허버트는 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사제(목사)들과 그들의 제의 및 교리 때문이다고 했다. 오늘날 허버트의 말은 타당하다. 계시종교들은 예외 없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제도화되고, 그 과정에서 목사들 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난다. 세력을 장악한 목사들은 교리를 만들어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갈등, 교회적 갈등을 일으켰고, 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의 질서가 목회자들에 의해 균열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사회는 종교 간의 갈등, 교회 간의 갈등, 교인 간의 갈등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제 인간사회는 인정이라고는 전혀 없다. 인정공동체도 이미 깨졌다. 성령도 몰각했다. 오히려 성령을 방매하는 군상들만 늘어가고 있다. 성령이 나에게서 너와 그에게로 흐르지를 않아 고인물과 같이 썩어버렸다. 곳곳에서 썩은 냄새만 진동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인간 모두가 욕망을 버리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외치는 복음(하나님의 참사랑=기쁜 소식)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믿음,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참사랑은 나의 마음을 열어 너와 그가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오늘의 사회와 교회에서, 버림받은 자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모두가 역사적 과정에서 항상 진리를 거역하며, 종교를 타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을 향해 있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렇다보니 스스로 선지자라고 말하고, 진리를 운운하며, 이단논쟁을 벌인다. 하나님을 강조하지만 피조세계에 대해서 외면한다. 물질적인 진리를 축복으로 여긴다. 편협한 신앙관으로 인해 이웃종교, 이웃교단, 이웃교회를 매도하기에 바쁘다. 한기총에 속한 교회들이 NCCK에 소속된 교단과 교회를 비난하는 이유도 편협한 신앙관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소수자도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민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념적 갈등을 불러일으키기에 바쁘다. 북한민족을 변화시키기보다는 때려잡자고 한다. 북한에서 한 말만 서운하게 생각한다. 제복 입은 자들을 칭송하기에 바쁘다. 힘의 의한 평화(팍스)를 갈망한다. 이것이 애국주의자가 됐다.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목회자이며, 교인이다. 같이 고통을 겪고 죽자고 한다.

이들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은 이념적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남녀 간의 갈등에서 벗어 날 수 없다. 6.25한국전쟁 73주년, 분단 78주년을 맞은 남북한민족은 함께 지난 남북 간의 갈등,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돌아보고, 함께 고민하며, 해결해야 한다.

평화적인 민족통일은 진보·보수가 없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출발해 하나님께 향한다. 이들에게는 영혼에 대한 갈급함이 전혀 없다. 신앙생활이 정적이지가 못하다. 죄의식을 전혀 갖지를 않는다. 자유분방하다. 이들 교회는 유럽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매우 진보라는 말을 듣는다. 교회성장에도 관심이 없다.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것은 허공을 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만큼은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오늘 한국교회는 지난 과오, 치명적인 약점들을 되돌아보고, 개선해 나가야만 미래로 나갈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인간은 분명 본질적으로 죄 아래 있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미래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인간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죄이지만, 갈등을 조장하며,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인간도 죄인이다.

분단된 한반도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극명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광야에서 외치는 돌멩이들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해야 한다. 모두가 지배욕과 소유욕에 길들여져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렸다. 복음(기쁜소식)을 상실했다. 모두가 가진 것을 지키기에만 급급하다. 그리스도인 모두의 입에서는 힘에 의한 평화, 팍스만 외친다.

예수님의 샬롬(평화)을 외치는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입버릇처럼 샬롬으로 인사한다. 모두가 가식적으로 살아간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기도한 만큼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를 들기에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필리핀 민다라오의 카톨릭과 이슬람 간 무력충돌의 평화협정 중심에 한국교회가 문제의 종교단체로 지목한 신천지 이만희 회장이 있었다는 사실. 이 회장은 가톨릭, 이슬람, 감리교 등 종교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평화협정을 이끌어 냈다. 신천지는 이를 영화로 제작해, 신천지 포교활동에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 예수님의 평화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이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이것이 6월 호국의 달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누가복음 191-10절에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온다.

성서, 미래가 없는 현실서 미래의 희망을

오늘날 이 이야기는 보수와 진보의 관점에서 재해석이 되고 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의 잘못 생활한 것에 대해서 회개했다. 그리고 빵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또한 강탈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고 약속했다. 분명 삭개오는 회개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받아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공동체에 참여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을 교육하고 있다. 성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세계에서 미래의 희망을 열어 준다. 오늘날 우리사회, 세계의 앞날은 암울하다. 곳곳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하나님의 질서에 균열이 생겨 인간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인간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 세계 도처에서 자연재해,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횡포는 갈수록 도를 넘어 심각하다.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것은 잃어버린 사람은 죽을 때까지 찾아 나서지만, 버림받은 자는 찾지를 않는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버림받은 자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싸주셨고,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을 깨닫자. 그리고 버림받은 자를 찾아 나서자. 이제 우리는 분단 78, 6.25한국전쟁 73, 6월 호국의 달을 맞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드리는 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자. 그래야만 미래로 나갈 수 있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세상을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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