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질서가 필요 없는 세계

7월은 법의 달이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헌데 오늘의 세계는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보니 하나님의 질서,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때문에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졌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사회는 혼란과 고통이 가중되어 왔고, 가중되고 있다.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은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떠돌이, 과부,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동원,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교육하고 있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법(율법)을 지키는 성직자와 교인은 거의 없다. 그것은 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보다는 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설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정치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질서가 이들에 의해 혼란에 빠지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도 이들에 의해 개발이라는 이름아래 파괴되고, 혼돈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세계 곳곳에서 자연재해와 전염병 등으로 못살겠다고 아우성친다. 전쟁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탐욕과 지배욕에 가득 차 마음에 법정인 양심이 마비된 결과이다.

양심이 마비된 사회는 혼돈만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법과 질서가 필요없다.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간다. 혼자 살기 위해서 너를 죽이는 세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법을 지키지 않는 인간들을 위해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자신의 성을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십계명)을 맺으면서, 거룩히 지킬 것을 권고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양심은 마음의 법정이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인간 모두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가다가도 돌아설 줄을 안다. 문제는 인간 모두가 양심과 하나님의 접정신에서 이탈해, 맘몬을 숭상하며, 바벨탑을 쌓기에 경쟁을 벌인 결과, 오늘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질서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질서, 교회의 질서가 무너져 곳곳에서 갈등과 분쟁이 만연하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서 이탈한 결과에서 온 것이다. 오늘 인간들의 양심이 마비되었다는 말을 들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인간들은 하나님 대신 맘몬을 사랑하며, 바벨탑을 쌓는데 몰두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구축하기에 바쁘다. 오늘 세계는 이웃이 없다. 혼자만 사는 세상이 됐다. 그렇다보니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핵 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 이제 세계는 하나님의 법은 물론이고, 나라 간의 분쟁을 막기 위한 국제법도 필요 없는 세상이 됐다.

신의 자리 돈으로 대치시킨 교회, 이웃종교 비판할 자격 없다
한국교회 교역자들 목사안수를 받는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위한 교회서 이탈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맘몬을 숭상하며, 십자가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로 인해 신의 질서는 무너지고, 교회의 무용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교회는 신약성서의 정결법과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는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일일노동자를 거부한다. 대신 권력자와 기득권자에 붙어 기생하는 군상들만 보인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세상의 종으로 전락했다.

또한 구약성서의 법정신인 가난한자, 소외된 자, 떠돌이, 과부,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의 사명을 상실했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다. 안식일법과 정결법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혼자만 살겠다고 몸부림친다. 그리스도인들도 혼자만 하나님나라(구원)에 가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래서 성서는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에서 이탈한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회개)”라고 촉구한다. 오죽했으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 대표회장이 종로5가를 걸어 다니는 목회자와 장로들을 향해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말했겠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스스로 박탈했기 때문이 아닌가.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독립운동과 구민운동의 중심적이었던 종로5가는 다윗건물(기독연합회관)이 들어서면서, 이 같은 모습은 없고, 다툼과 분열의 현장이 되었다. 종로5가를 걸어 다니는 목사와 장로들은 자신을 향해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말을 해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래서 어느 목사는 아멘 하지 말라고 했다.

종로5가의 목사와 장로들은 동역자를 죽이고, 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이 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이며, 양심적인가고 교인들은 묻는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것은 분명 아니다. 전 목사는 또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자유통일을 위한 교회연합총대회에서 교역자는 목사안수를 받는 순간부터 타락한다고 했다. 이는 목사가 하나님의 질서,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데 중심에 있다는 말로 들린다.

전 목사의 이 같은 질타에 대해 누구도 부정하거나 항의하지 않는다. 그만큼 목회자들이 교회와 사회, 그리고 영의 세계를 혼란과 혼동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사실 한국교회는 북한 3대 세습에 대해서는 핏발을 세워 비난하면서,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한국교회 목회자는 이성적인가. 교인들에게 순종만을 강요하며, 성서의 민주주의로 가장하는 오늘 교회는 합리적인가. 마음의 법정인 양심에 물어 보라.

담임목사 세습이 일반화되고, 이를 성서적이라고 말하는 한국교회는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세습에 대해서 비판 할 자격조차 상실했다. 담임목사 세습은 목회자의 파쇼적인 교회운영철학이 불러 왔다. 맘몬도 여기에 한 몫을 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학식과 믿음에 좋아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잘 만나야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될 수 있다. 돈과 정치력이 있어야 큰 교회에 부임 할 수 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도 돈이 있어야 피택을 받는 세상이 됐다. 교회도 돈이 최고인 집단으로 변질됐다. 그러면서 모두가 거룩한 척만 한다. 모두가 성령을 찾으며, 성령을 방매한다. 이들이야 말로 외식하는 자이다. 성경은 이들을 향해 화가 있을 진 적이라고 책망한다. 모두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하다.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굳어져버린 마음

이제 한국교회는 믿음과 신앙, 인간의 됨됨이로 교회의 직분을 결정하는 시대가 아니다. 오늘 개신교는 이 최고인 종교가 됐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실어하시던 돈(맘몬)이 있어야 교회의 직분도 맡고 행세 할 수 있다. 돈이 신분을 결정하는 교회로 변질됐다. 예수님은 돌로 만든 떡을 거부하셨다. 바벨탑(권력)도 거부하셨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아픔에 함께 아파 할 줄을 모른다. 이웃나라의 국민들이 전쟁으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자연재해로 고난을 당하는 민족과 함께하지를 못한다. 슬피 우는 자와 함께 울지를 못한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 의해서 살해당하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모두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한다.

그렇다보니 목회자들은 신구약성서의 중심사상인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 돈이 축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다. 목회자들은 무조건 교인들에게 순종만을 강요한다. 교주화되어 가는 한국의 일부교회가 바로이단이며,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는 사이비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이비가 문제이며, 사이비에 의해 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있다.

여기를 봐도 삯꾼, 저기를 봐도 삯군, 사이비가 판을 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있다고, 속옷까지 빼앗아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 곳에 신을 가두어 버린다. 바벨탑 아니 교회당에 갇힌 신은 아사직전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고, 양심적이라고 말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해 칸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칸트는 분명 신구약성서의 법정신에서 이탈한 교회의 성직자와 교인을 보고,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했을 것이다. 칸트의 말대로 양심은 마음의 법정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양심이 필요하지 않다. 믿음과 신앙, 경륜도 필요하지 않다. 돈만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양반이 된다. 성서는 분명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해방을 주제로 삼는 경전이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그리스도인라고 말 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를 주창하며,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켰다. 오늘 한국교회가 역사를 왜곡하며, 고난당하는 민족과 함께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한국의 어느 목사는 만주벌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투사를 부정한다. 원자폭탄 2방이 대한민국의 해방을 가져다가 주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는 한국교회를 지나간 고난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일본식민지 아래서 일본군에게 시궁창만도 못한 대접을 받은 이 땅의 소녀들, 일본군의 총알받이지가 되었던 이 땅의 청년들, 일본에 노무자로 끌려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우리의 부모형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성서의 법정신을 올바로 교육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성을 잃어버린 비양심적인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이 바로 천박한 목사이며, 핵쓰레기를 바다에 버리겠다는 일본의 대변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고 말하며 외식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성서의 법정신에서 이탈한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은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기 위해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고 해야 옳다. 그것은 목회자들이 맘몬과 바벨을 숭상하는 삯군 목사로 변질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장사하는 장사꾼이다.

교회, 보수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매몰

삯꾼 목사들의 입에서 예수님의 샬롬(평화)이 나오기를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샬롬 대신 로마팍스(힘에 의한 평화)를 노래한다. 이들은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마비시켰다. 이들에게서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근본주의와 원리주의에 갇혀 이웃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없는 가짜 목사이며, 가짜 그리스도인이다. 외식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보수 보수를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떨어졌다.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기쁜소식)을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모른다. 교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목회자, 사람 보고서 교회를 다닌다. 이는 오늘 일부 교회의 목회자가 교주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보니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목회자의 직함이 권력이 되었다.

전광훈 목사의 목사는 안수를 받는 순간부터 타락한다는 말은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를 향한 경고의 말이기도 하다. 중세 평신도 신학자 허버트는 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사제(목사)들과 그들의 제의 및 교리 때문이다고 했다.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서 이탈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꼭 적용되는 말이다.

중세의 계시종교가 그랬듯이 한국의 계시종교(기독교)도 예외 없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제도화되고, 그 과정에서 목사들 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난다. 세력을 장악한 목사들은 교리를 만들어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적 갈등, 교회적 갈등을 일으켰고, 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의 질서가 목회자들에 의해서 균열되고 있다. 오늘 연합단체나, 교단이나, 교회의 분열현장의 중심에는 힘 있는 목회자가 있다. 교회의 분쟁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최삼경 목사가 어느 목사의 출판기념회설교에서 오늘 한국교회는 1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목회자의 교주적인 아집의 죄는 교회와 민족의 죄가 되었다. 신학교, 연합기관, 담임목사의 세습을 꿰뚫어보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흐르면서 성숙해져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할 목사는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간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와 교회, 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고난당하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가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단집단의 돈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사이비다. 오늘 한국교회는 결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이비의 문제이다. 이단은 나름 신념과 신앙이 있다. 이단은 피도, 눈물도, 사랑도, 용서도 있다.

하지만 교주화 되어가는 한국교회의 일부 사이비 목회자에게서는 이런 것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데 안타깝다. 성서의 법정신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로 요약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과 주고받으면서 사는 참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이웃과 정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관계가 설정돼 있다. 하나님의 참사람(복음=기쁜소식)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가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소유가 생기고, 왕권이 수립되어 권력이 인간관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구약의 법정신은 철저하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오늘 현대국가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에는 3개의 법전이 나온다. 계약법전(출애굽기), 신명기법전(신명기), 성법전(레위기)이 바로 그것이다. 3개의 법전 모두 상황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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