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민 교수
이 민 교수

미국의 정신분석과 의사인 칼 메닝거(Karl A. Menninger 1893~1990)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대답은 이랬다. “지금 집 밖으로 나가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헌신적으로 도와주라.” 유명 병원이나 의사를 찾아서 치료받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헌신하라는 것이다. 국어사전의 헌신(獻身)에 대한 정의는 “어떤 일이나 남을 위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이다. 기독교 관점에서는 ‘헌심’(獻心)이 아니라 ‘헌신’(獻身)이다. 마음이 있으면 시간과 물질까지 바쳐야 한다. ‘성령행전’으로 불리는 《사도행전》의 영어 이름은 ‘Acts’(행동들)이다. 성령도 행동하시며 말씀하신다. 복음적으로 보면 ‘헌신’은 바로 마음만이 아닌 행동을 부르는 ‘순종’이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나타난다. 가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부족한데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물을 가져오라 명하신다.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했다. 이해되어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다. 그제야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이 기적의 핵심 가치는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요 2:11)이다. 그래서 ‘기적’(테라스 teras나 두나미스 dunamis)이 아닌 ‘표적’(세메이온 semeion)이다.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드러난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 나이 사십 세가 될 때까지 구걸하던 거지가 있다. 예수께서 치료하신 방법은 인간으로서는 이해불가다. 손으로 눈을 만지는 대신 침을 땅에다 뱉고서 그 침과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셨다. “당장 눈을 떠라!”라는 주문 대신 멀고 먼 실로암까지 가라고 명하신다. 신기하게도 이 시각장애인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대로 ‘순종’한다. 결국, 그는 눈을 떴으며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었다.”(요 9:3) 이 기적 역시 ‘표적’이다. ‘헌신’이 ‘순종’을 ‘순종’이 ‘표적’을 낳았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장면이 있다. 여기에서 우선 주목할 키워드는 39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나사로의 부활에만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이와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옮겨 놓는 ‘순종’을 통해 ‘기적’을 베푸셨다. 이 또한 ‘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의 말씀을 성취한다. 예수께서는 램프의 요정처럼 주문만 하면 “펑”소리와 함께 기적이 나타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돌을 옮겨 놓지 않아도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지만 의심과 불신의 돌을 치우라고 명하신다. ‘의심’은 도마처럼 믿어지지 않는 불가항력적 상태이고, ‘불신’은 아예 믿지 않으려고 작정하는 의지적 요소가 강한 상태이다. 물론, 이 둘은 ‘순종’과 대척점에 서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과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신학자인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이를 ‘His Part and My Part’라고 규정한다. 살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돌까지 옮겨주지 않으신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와 일맥상통한다. 대개 사람들은 예수께서 일으키신 수많은 ‘기적’을 감상만 하는 ‘형용사적 인간’이다. 이들은 출세, 부귀, 명예, 승진, 취업, 무병장수 등과 같은 ‘생활기적’만 소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관하지 않는 즉각적인 ‘순종’을 통해 ‘표적’을 이루는 ‘동사적 인간’을 원하신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한국교육기획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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