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덕 교수
김 재 덕 교수

요즈음 우리 사회는 어두운 세력의 활개로 질서, 타인 존중, 공경, 예의, 배려 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나 중등학교에서 교육의 권위를 위임받은 교사들에게 일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폭력을 가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가정에서는 자녀가 자존심이나 감정 상하는 일이 생기면, 부모에게 욕을 한다거나, 심지어는 폭력을 행하는, 매우 슬프고 충격적인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자녀 양육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서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할 것입니다. 지금은 사탄이 우리 자녀들의 틈을 엿보며,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는 상황입니다(벧전5:8). 앞으로 이런 상황이 점점 강화될 것입니다. 부모들은 이것을 단순한 사회병리 현상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근신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눈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분별해야 자녀 양육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사회의 흐름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허무주의자나 회의론자처럼 세상을 포기하고 적당히 살라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우리 각자에게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닌 하늘 본향을 목적으로 살아가길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 자녀의 성품 중의 하나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사회가 타인의 잘못을 포옹하고 용서하기보다 지나치게 비난하고 경쟁하는 사회로 변하면서, 위와 같은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즉, 사랑이 너무 부족한 결과입니다. 이제, 우리 자녀들에게 비난과 경쟁보다 포용과 용서를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한 사랑의 징표입니다(눅23:34).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두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기에, 용서는 사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Forgiveness(용서)는 forgive(용서하다)의 명사형으로, forgive는 for와 give의 합성어인데, give는 ‘주다’라는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무료로 주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forgive는 ‘남에게 무료로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forgiveness(용서)는 ‘타인에게 무료로 주는 것(선물)’의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타인을 용서하면, 우리의 잘못도 용서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6:14, 15). 그것은 용서한 자를 구원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나와 상대방을 위한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헬라어로 용서를 ‘아페시스’라고 하는데, 이 의미는 ‘죄를 떼어서 떠나보낸다’라는 것으로, 내가 죄에서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타인의 잘못을 마음에 두면 죄가 되지만, 내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면 나에게서 죄가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는 원망과 분노가 있어 죄가 되지만, 용서의 마음은 분노나 원망을 멀리 보내는 평안의 마음이 되어서, 서로가 적이 아닌 선한 친구가 됩니다.

용서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타인이나 자녀의 잘못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연습을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용서가 안 되는 경우 나의 죄부터 먼저 생각해보면, 나도 알게 모르게 타인들에게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용서의 마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심판 날에 예수님께서 나의 자녀들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용서하는 자에게 평안과 구원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녀가 되자!        
                      
고려대 교육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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