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주 교수
김창주 교수

시인의 절박하고 간절한 호소는 두 겹으로 나타난다. “내게 은혜 베푸소서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 베푸소서(יננח).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고(היסח)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합니다(הסחא).” 그만큼 주의 은혜가 갈급하고, 그만큼 안전 공간이 절실하다는 뜻이겠다. 특히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눈길이 머문다. 시편에서 이 표현은 마치 관용구로 쓰이듯 상당히 익숙하다(시 17:8; 36:7; 61:4; 63:7; 91:4). 그런 만큼 ‘주의 날개 그늘’은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이라는 상징이 강할 뿐 아니라 은유적인 이미지 이상의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이 은유의 의미는 다음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주의 날개 그늘’은 가장 먼저 어린 새의 경우에 비견된다. 어미 새는 본능적으로 외부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아기 새를 지켜낼 것이다. 다음 구절은 시인의 뛰어난 관찰력을 보여준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תפחרמ)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야웨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1).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모습이다. 어미는 부화한 어린 새가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날개 아래 숨긴 채 먹이고 보호한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였다고 기록한다(출 19:4). 어쩌면 어린 새에게 어미의 날개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며 동시에 가장 안전한 시간일 것이다. 직접적인 구원을 표상한다.

둘째로 ‘주의 날개 그늘’을 성전과 관련하여 풀어보면 지성소의 법궤 위에 있는 그룹의 날개와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속죄소 또는 시은소(施恩所) 등으로 번역된 카포레트(תרפכ)는 사실 ‘그룹의 날개’ 아래를 가리킨다. 그곳은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다. 따라서 시인은 다급하게 이 장소를 떠올리며 ‘은혜를 베푸소서,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간구했을 것이다. ‘은혜의 장소’ 카포레트는 시인에게 가장 안전한 공간이다. 시인이 염원하는 구원을 신학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셋째로 ‘주의 날개 그늘’은 창세기 1장 2절에 암시된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에서 히브리어 메라헤페트에 주목하자. 이 낱말은 피엘 분사형으로 어미 새가 둥지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관찰한다는 뜻과 ‘알을 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세상 창조 이전의 공간을 상상한다면 혼돈과 흑암으로 가득한 곳에 하나님의 영이 마치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 주위에서 맴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다. 신명기의 표현을 빌면 ‘새끼들 머리 위로 날개를 펴서 퍼덕 거리는 모양’이다(신 32:11).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돌보시며 구원하시는 모든 과정을 함축적으로 예시한다. 한편 ‘주의 날개 그늘’을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광경과 나란히 놓고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w`sei. peristera.n)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라(마 3:16).

새 하늘이 열리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온 모습은 마치 태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는’ 장면과 겹친다. 메시야 공인식을 통하여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행로를 성령이 날개를 펴고 맴돌며 함께 하는 모습이다.  

사막에서 뜨거운 햇빛을 피할 손쉬운 방법은 그늘을 찾는 것이다(사 4:6; 욘 4:8). 시인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화급하다면 재빨리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는’ 것뿐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은혜를 경험하고 ‘하늘에 미치고 궁창에 이르는’(10절) 구원을 맛보게 된다. 이로 인하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상에 높아진다’(5절). 전통적으로 시편 57은 부활절 아침에 낭독되거나 시편 본문으로 인용되었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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