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남아 있는 것 

섬에 와서야 알았다.
도시의 먼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음을
약수터에 앉아서 알았다.
내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배어 있음을
섬에 와서야 알았다.
아직도 황금이 남아 있음을 
상처를 어루만지며
나를 연단시킬 사랑이 남아 있음을
섬에 와서야 알았다 

-시집 『백만장자가 된 사나이』에서

* 정신재 시인 : 
문학박사(국민대학교) 평론가 등단(시문학)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문학평론가협회상. 한국크리스천문학상

정 재 영 장로
정 재 영 장로

섬은 삶의 장소를 유추하는 도시적 상황에서의 탈피 또는 거리를 둔 상황을 말한다. 탈속이나 초월을 의미함으로 종교적 현존을 보여주고 있다. 

그 섬은 고독의 상황이다. 고독과 고립은 다르다. 전자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도피하여 생기는 현상이고, 후자는 타인이 자기를 따돌림으로 만들어진 상태다. 고독은 키에르케골과 김현승의 고독처럼 신을 찾아 나가는 과정의 고독과 신으로부터 탈피함으로 오는 고독으로 서로 역방향성을 가진다. 그러나 작품 속의 고독은 자기만의 깨달음의 순간으로 정지된(확신하는)고독이다. 각성에서 오는 자기성취로 생기는 정서다.

‘알았다’는 말은 지식적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성경에서 든다면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에서 나오는 앎이다. 히브리어 ‘야다’나 헬라어의 기노스코가 지식적인 오이다(know)와 구별되듯, 여기서 알았다’ 함은 기노스코와 같은 의미다, 이런 앎은 관찰(observation)로 이루어지는 지식이 아닌 통찰(insight)로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약수터라 함은 치유의 장소를 말한다. 실로암의 소경의 치유를 함축하고 있다. 신 앞에서의 깨달음이며 치유라 말할 수 있다.

버릴 수 없는 원초적 욕망을 ‘도시의 먼지’나 ‘더러운 냄새’나 ‘황금’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절대적 가치인 사랑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 사랑은 인류에게 소망을 발견하게 해주는 확신이며, 시인의 신앙이다. 

평론가이기도 한 시인은 라캉의 탈경계를 추구함을 본다. 이 작품은 육지와 섬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에서 양면성을 살피는 것으로, 융합시론과 매우 흡사하다. 

작품 특성 중 드러나는 점 하나는 천상적 이미지를 지상적 이미지로 치환해야 하는 창작이론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