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 평화적인 민족통일, 소외된 이웃, 세계평화와 선교 등의 제목을 놓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 문제는 모두가 기도한 만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내용과 상관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일컬어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말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 이웃을 섬기라고 하면서 섬기지 않는다. 예수님의 샬롬(평화)를 말하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말한다.

기도한 만큼, 행동하라

그렇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말하는 자는 많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한다. 문제는 자신이 기도한 것에 대한 행동이 없다는 것이다. 동네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의 수만큼, 그리스도인은 많은데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는 쉬지 않고 하는데,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의 설교집이나, 저서의 제목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여 행동하라!”는 제목을 붙인다.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이것이 교회이다”, “이래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목회자의 설교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진정성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모두가 율법주의자, 보수주의자가 되어 성령을 방매하며, 복음을 헐값으로 뿌리기에 바쁘다. 모두가 교회가 가야할 길,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에서 이탈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밤마다, 새벽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울부짖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 방망이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만이 하늘의 축복으로 여긴다. 이것은 선교 초기부터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예수 믿고 천당 가라”, “헌금의 액수가 믿음의 척도이다고 강조한 결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기쁜소식=하나님의 참사랑)을 상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이나 주는 복 방망이로 만들어 버렸다.

모두가 기복신앙에 길들여져 복을 달라고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교회들은 하나님께 드린 헌금으로 호화로운 십자가 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고, 수백억 원을 드려 웅장하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한다. 모두가 십자가의 고난을 몰각했다. 분단된 민족의 아픔도, 굴절된 민족의 아픔도,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이웃의 아픔도, 전쟁과 배고픔으로 슬피 우는 세계민족의 아픔도 몰각했다.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 평화적인 민족통일, 소외된 이웃, 세계평화와 선교 등의 제목을 놓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 문제는 모두가 기도한 만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내용과 상관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 평화적인 민족통일, 소외된 이웃, 세계평화와 선교 등의 제목을 놓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 문제는 모두가 기도한 만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내용과 상관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자
하나님 전능
, 미래로 가기 위한 희망의 근거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자

모두가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이러한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지만, 이런 기도는 행동하지 않는 허공을 치는 기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고 들으면서, 정말 그리스도가 그곳, 호화롭고 웅장한 교회당에 있을까(?), 진짜 교회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이래야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외치는 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있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덤불과 벼랑 끝을 헤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호화로운 십자가 탑, 수백억을 집어삼킨 교회당에 계실까(?) 의문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두가 교회가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틀린 말이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는 곳에 교회도 가야 한다.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대목이다.

모두가 탐욕과 바벨, 맘몬에 길들여져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충혈 된 눈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 알기 위해서는 마음의 정화는 물론이고, 깨끗한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 역사의 흐름,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아한 귀를 가져야 한다.

그래도 초대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참사랑(복음=기쁜소식)을 실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교회는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에서 고난을 당하던 한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학교를 세워 배우지 못한 무식한 백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고,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고난을 당하던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당시 교회들은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성경 속의 진리를 간파하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곤궁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결과 교회는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헌데 맘몬과 바벨, 탐욕에 길들여진 교회는 민족의식도,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두가 맑은 눈을 잃어버렸다. 청아한 귀도 막혀 버렸다. 역사가 흐르는 물줄기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모두가 강대국과 부자를 섬기는 교회로 변질되었다. 그렇다보니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샬롬)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대신 힘의 의한 평화(로마팍스)의 소리만 들린다. 이웃 종교가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외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평화를 가장한 거짓평화라고 폄하하기 일쑤다.

평화와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그것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맑은 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아한 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원한 속에서 74년을 살아온 한민족, 분단된 채 무기경쟁을 벌이며, 긴장상태에 있는 한반도의 현실 속에서, 교회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참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이다.

독일 평화와 통일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교회만은 하나였다. 독일교회는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과 정치범들을 위해 봉사했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으려고 하지도 않지만, 이슬람교도와 천주교도 간에 끊임없는 무장투쟁으로 인해 총성이 끊기지 않던 필리핀 민다나오 평화의 중심에 이웃종교(HWPL)가 있었다는 사실.

HWPL은 천주교 대표와 이슬람교 대표, 기독교 대표의 민다나오 평화를 위해 무장투쟁 중단하는 서명을 이끌어 냈다. 이날 민다나오 주민들은 민다나오의 평화를 외쳤다. HWPL은 이를 기념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자신의 종교를 홍보하는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세계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화정착을 위한 심포지엄도 갖고, 종교가 세계평화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무기경쟁을 벌이며, 남북한민족의 공멸을 자초하는 한반도에서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극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삶의 현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복음=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현장이 아닌가.

그곳은 해방이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무기경쟁을 벌여 남북한민족 공멸을 자초하는 분단의 현장이 아닌가. 이제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탐욕과 맘몬, 바벨을 벗어 던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이념논쟁,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잘못을 회개하고, 한반도의 평화(샬롬)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올바른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지 않겠는가. 최소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교회,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성경은 분명하게 평화(샬롬)와 사랑, 기도하는 만큼 행동하는 삶을 교육하고 있다. 마태복음 2522-30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나라와 관련해서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비유로 교육하고 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1)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성경말씀 뒤에 대 심판의 이야기가 나온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 옥에 갇힌 자에게 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고 심판을 내린다. 이 말씀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주인의 기쁨에 비유해서 말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기쁨,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위해서 행동했다.

이 두 종은 주인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도록 일했다. 자신의 안위와 평안보다도, 주인의 평안을 위한 일에 충실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돈을 감춰 두었다. 이 종은 책임을 회피했다. 또한 주인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했다. 이 종은 행동을 거부했다. 그렇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종과 같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이 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안위와 자신에게만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지.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저버리지 않았는가. 오늘 한국교회는 구약성경을 율법을 외치다가 율법주의가 되었다.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수보수를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마디로 현실에 매달리다가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 행동하지 않는다. 변화가 두렵다. “무엇을 위해서 저지른 죄보다도, 무엇을 하지 않은 죄가 더 크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은 죄가 가장 크다. 굶주린 자와 억눌린 자, 병든 자를 위해서 일하지 않은 죄 또한 크다.

한마디로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분명하게 죄인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념에 갇힌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해야 할 북한동포를 적대시 하며,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북한동포와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한다. 한반도의 평화(샬롬)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을 거부한다.

올바른 교회·그리스도인 되라

이는 한마디로 허공을 치는 기도이며,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며,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가는 교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은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준다. 중형교회 중 하나인 분당횃불교회(담임=이재희 목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일과 세계평화와 인류 구원을 위한 세계선교에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적은 가운데서도 함께 나누며, 미래의 전도자원을 만들어 내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이밖에도 부자교회와 일부교회들이 소외된 이웃, 작은 교회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 올바른 교회상,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연합을 비롯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교회총연합, 한국장로교총연합회, 글로벌 에듀,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등의 단체와 교회들은 가난과 질병, 전쟁, 자연재해로 고난당하는 세계민족을 돕고 상생하는 일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교회가 세계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동시에, 이직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탐욕과 맘몬의 눈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맑은 눈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나서자. 청아한 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가기 위한 희망의 근거이다. 분단의 아픔으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남북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 평화통일을 향한 희망의 근거이다. 또한 전쟁과 기아로 고난당하는 세계민족이 내일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이다.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국교회가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이념에 갇혀 있는 것은 교회가 국민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보다 교회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역사와 세상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쁘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 이루어 줄 것으로 여기고, 사회와 역사의 흐름을 방관하기에 바쁘다.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면서, 하나님의 질서,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안전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 나라의 전능은 맘몬과 바벨에서 벗어나 한번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 평화적인 민족통일, 인류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기대어 평화롭고, 정의롭게 살아가기 위한 시대적 사명의 근거라는 것을 이 땅에 세워진 교회와 그리스도인 모두는 깨달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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