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더 큰 슬픔

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 
저 생의 본능이,
상주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 가족에게도
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문 현 미 시인
문 현 미 시인

슬픔의 크기를 측량할 수 있을까? 혹은 슬픔의 무게를, 슬픔의 넓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 사람이 느끼는 슬픔은 저마다 달라서 어떤 슬픔이 더 큰 슬픔인지 알 수 없다. 각자 자신이 겪은 아리고 쓰라린 어떤 사연이나 사건으로 슬픔을 느낀다. 그때마다 슬픔은 여러 가지 모양과 빛깔로 우리 스스로를 짓누르며 다가온다. 슬픔이 찾아오는 순간에 이성의 시간은 정지된다. 온전히 감성의 시간에 노출된 몸과 마음의 상태가 지속된다. 동일한 사건에 직면하더라도 슬픔은 개인마다 다르고 연령이나 컨디션, 동기나 원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슬픔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시의 제목이「밥보다 더 큰 슬픔」이다. 슬픔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소재들이 많을텐데 하필 밥을 선택했다. 의식주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3가지 요소다. 그 중 먹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먹어야만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며칠만 굶으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성의 시간보다 감성의 시간에 붙들리게 된다.“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본능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사람의 민낯이다. 어떤 슬픔이 밀어 닥쳐도 사람은 먹어야 산다.“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저 생의 본능”을 읽으며 생의 모순을 떠 올린다.

시적 화자는“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시적 반전이다. 이런 질문을 던질 때,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누구든지 슬퍼도 밥을 먹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목숨의 아이러니다. 사랑에 목숨 걸고, 돈, 권력, 명예에 목숨 거는 세상에서 슬픔을 겪는 모두를 생각해 본다. 밥이 보약이다는 말이 있다. 밥보다 더 큰 슬픔을 맞는 누군가에게 슬픔도 견디고 이기고 나면 보약이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가을이다, 부디 슬퍼하지 마시기를......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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