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 없는 삶에 빠진 그리스도인

앞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데, 말과 행동이 다른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진단한다()>에서 지적한대로 오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자신에게 충성한다. 그래서 맡겨진 것을 지키는 것이 제일 좋다고 여긴다. 모두가 자신의 기복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미래로 나가기를 거부하고, 보수주의에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했다.

내가 받은 진리와 신앙을 지키고만 있으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 달란트를 땅에 감춰놓은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에 충성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은 일이, 하나님나라의 재물을 잃는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 하나님이 준 달란트(재물)를 자신과 가족을 위해 다 허비하는 사람은 하늘의 가족을 잃는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은 자신의 진리와 신앙만을 지키다가 이웃을 잃어버렸다. 이는 결국 한국교회가 선교의 자원을 잃어버려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전통적 신앙이나, 교리를 붙잡고 안심하는 사이, 하나님의 참사랑(복음=기쁜소식)을 상실했다. 적어도 책임이나, 벌을 면하겠지 하면서 안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키 어렵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실 어느 교회의 목사는 이웃종교의 교인이 등록하면, 교회에서 추방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혼자만 살겠다는 것이 아니고서는 달리 해석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나라는 혼자 가는 곳이 아니다. 너와 나, 그리고 그와 함께 가야하는 곳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남한민족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계민족 가운데 현존하시는 모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 미래로 나가야 한다. 비록 삶은 어렵고, 곤궁하고 위험하더라도 용기를 갖고,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 새로운 세상을 향해 일어서야 한다. 그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주변만을 맴도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키 어렵다. 최소한 그리스도인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되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자
어렵고 힘든 자를 통해서 내가 구원 얻는다

새 신자 교회서 추방하는 일까지

오늘 한국교회는 자신의 진리와 신앙만을 고집하다가 분열과 갈등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자신의 신앙과 교리, 제도가 다르다고 이웃교회와 목회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단연구가의 신앙과 믿음이 이들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보수연합단체의 분열은 그것을 그대로 증명하고도 남는다.

모 단체의 이대위원, 모 교단의 이대위원은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정화되지 않은 마음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교단과 교회, 목회자를 이단으로 규정, 이단의 올무에 씌워 하나님나라운동을 방해한다. 신앙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쳐서 하나님나라운동에 동참하게 할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 문제의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뒷거래를 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이들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이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해서 일하는 적그리스도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모두가 보수 보수를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떨어진 것은 물론, 교리와 제도에 갇혀 이웃교회, 이웃단체, 이웃종교를 적대시하기에 바쁘다. 그렇다보니 이웃의 아픔과 고난을 모른다. 이웃교단의 신앙과 신학을 존중할 줄도 모른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혼자만 하나님나라에 가겠다고 아우성친다. 혹여나 이웃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이웃교회 교인들이 몰려올 것에 기대를 걸고, 박수를 치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오늘 한국교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어느 이대위원은, 아니 이단연구가는 완장이라도 하나 얻은 듯 한국교회의 헌병노릇을 하며, 교회의 잘서, 하나님의 참사랑의 토대를 무너트리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에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모두 허비한다. 십자가탑을 쌓는 데만 경쟁을 벌인다.

이들이 바로 하늘의 재물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이다. 모두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지 못해 역사의 흐름, 그리스도가 있는 곳을,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중세시대 평신도 신학자인 허버트는 마음의 정화를 경험한 자만이 신의 섭리를 감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계시적 종교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도화되고, 그 주도세력인 성직자들이 권력투쟁에 몰입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어 종교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고 했다.

교회,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가자

사실 허버트의 말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는 쉬지 않고 하는데, 행동 없는 삶에 빠져 들고 말았다. 모두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 드릴 줄을 모른다.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지를 못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지를 못한다. 이웃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일하러 나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노동자를 보고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주일날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에 나가, 주여! 주여!를 외친다. 이들은 성령을 방매하는 자이며, 하늘의 재물을 잃어버린 자이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을 산 이 땅의 소년들,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된 이 땅의 젊은이들이 하늘을 향해 호소해도, 이 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를 못한다. 모두가 당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이들의 호소를 외면하기 일쑤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저버렸다.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당하는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드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샬롬), 이 땅에서 실현된다. 헌데 탐욕과 맘몬에 길들여진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적게 행동하려고만 한다. 곳곳에서 전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죽임을 당해도, 기아로 굶어죽어도, 자연재해로 죽음을 당해도,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한다. 인정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하늘의 보화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모두가 기독교는 행동하는 종교이다는 사실을 잊었다. 모두가 은혜만으로, 믿음만으로 외치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 은혜와 믿음은 믿음과 은혜를 비닐봉지에 꼭꼭 싸서 땅에 묻어두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잊었다. 이러다가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세계를 악하다고 여기고,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하면, 손해 볼 것이 두려워 아예 장사를 집어치운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이 하늘의 심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른다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버림받은 자들이 있는 곳, 무거운 짐을 지고 슬피 우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리스도를 섬기듯 그들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이들을 위해서 사용할 때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삶이 허락된다는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70-80년대 농어촌교회의 희생 속에서 양적으로 크게 팽창했다. 한 건물에 2-3개의 교회가 하루 밤 자고 나면, 세워졌다. 구멍가게처럼 십자가가 없는 곳이 없었다. 교회의 십자가 탑은 많은데,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데 안타깝다. 한마디로 교회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신용도는 갈수록 떨어지고, 목회자의 신용도도 바닥을 치고 있다.

겉은 요란한데 속은 비어 있다. 기도의 소리는 하늘을 찌르는데, 행동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교회가 있어야 할 곳에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가 본래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들어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것만이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갈 수 있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가야 한다. 전쟁과 기아로 고난당하는 이웃과 하나님의 참사랑(복음=기쁜소식)을 실현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통당하는 이웃,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는 이웃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이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다.

S센터 대표 G목사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 인도를 비롯한 캄보디아, 필리핀, 아프리카, 중남미의 빈민가에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듯 이들 나라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충실하고 있다.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며,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고 있다. 이 센터는 특정교단의 이대위원의 비난 등을 받으면서도, 이들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흡족하지는 않지만 일용할 양식을 함께 나누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어린이들을 위해서 방과 후 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목회자 윤리적 타락에 탄식

이 센터는 분명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 센터 대표는 이단연구가들에 의해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목사로 낙인 찍혔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생활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가난한 이웃에게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는 이 센터의 교인들은 이 센터를 비난하는 이단연구가 보다도 믿음과 신앙이 두텁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념이 강하다. 한마디로 이들의 신앙과 믿음은 분명하다.

최소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곤궁하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하나님의 참사랑(복음)을 선포하고, 성경의 경제정의인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의 선교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교회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국교회는 현재에 안주하며, 하늘의 보화를 꽁꽁 싸서 땅에 묻어 두었다.

어느 교단의 권사와 여성장로들은 목회자들이 모이면, 마시며 윤리적으로 타락해 가고 있다고 탄식한다. 이들은 또 기독교계 신문과 방송이 목회자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항의한다. 일부 이단연구가는 교회도 없다. 그렇다고 신학적으로 정립된 것도 아니다. 완장 하나 얻어 차고, 아니 자칭 이단연구가라며,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며, 목회자와 교인들을 괴롭힌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토대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웠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서 찾으려고 노력 한다.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아 떠난 교인의 자리를 채우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 예수님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서 이탈한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사귀고 어울렸다. 그리고 세리와 창녀가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예수님은 생각이 서로 다르고, 성격이 서로 다른 사람, 지위와 신분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귀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르쳤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합일을 이루라는 것을 당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 드리라고 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고 한다.

헌데 오늘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끼리끼리 모이는 단체로 변질되었다. 사회는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죄인은 죄인끼리 살아가는 것이 생활의 기본원칙이다. 교회도 학벌이나 지위가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서 친교하는 사교집단으로 전락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무식한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올 수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문턱은 높아 질대로 높아졌다. 사회적으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장소가 됐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기를 거부한다. 헌금을 많이 내는 부자를 환영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이다. 헌금액수의 크기가 바로 믿음의 척도가 됐다. 선진국이 된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부자가 된 오늘 한국교회도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을 만날 수 있다.

이들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교회도 돈이 있어야 나가는 곳이 됐다. 믿음과 은혜로 직분을 결정하는 시대가 아니다. 돈이 있어야 장로, 집사, 권사가 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돈을 써야 대접을 받는다. 이런 집단은 사교집단이다. 사실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 성령을 방매하며,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에 바쁘다. 이런 교회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웠다고 할 수 없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목회자는 아프리카, 필리핀, 인도 등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참사랑(복음=기쁜소식)을 실현하는 일에 헌신한다. 이들은 힘들고 곤궁하지만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는다. 이러하듯 교회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는 자리이다. 초대교회가 그랬고, 로마교회가 그랬으며, 한국 초대교회가 그랬다. 이 때 교회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얘기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와 소외된 자를 찾아 나섰다. 목자는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그대로 두고, 한 마리를 찾아 가시덤불과 벼랑 끝을 헤맨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면,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쁨이 넘치는 잔치를 벌인다. 이것은 합리적인 계산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사랑, 아가페 사랑이다. 오늘 교회에서 이런 사랑을 찾아 볼 수 없다는데 안타깝다.

자기 욕심만 채워지면, 자기가정이 행복만 이루어지면, 세상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행동을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말 그대로 이런 사랑은 어리석은 사랑이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어리석지만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이다.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사랑이다.

잃어버린 자 찾아 나서는 교회되자

예수님의 어리석은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 참사랑이 담겨 있다. 인간은 잃어버린 자를 그대로 두고서 인간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참사랑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다. 상처받고 버림받은 자를 외면할 때,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인간이하가 된 것이다. 잃어버린 자를 방치하면, 공동체의 참된 토대는 무너진다. 공동체의 토대가 무너지면, 한국교회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소망이 없다.

오늘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자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사람의 아픔을 동정하지 않는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이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공동체이다. 무능한 인간, 소외된 인간, 가난한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을 잘 돌보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정박아, 장애인, 각종질병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사람, 한 맺힌 사람, 전쟁과 기아로 고난당하는 사람, 죄인,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고, 이들을 감싸 줄 때, 내가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사회와 교회는 버려진 인간들을 통해 구원을 받고 완성된다.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를 통해 나와 교회, 사회가 구원을 받는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고,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교회,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교회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없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교회,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교회, 자기들 가운데 안주하는 닫힌 교회이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일하러 나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노동자, 일제의 희생양이 된 이 땅의 소녀들의 하늘을 향한 호소를 듣지 못하는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공동체(교회)이다. 이로 인해 교회의 토대,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지를 않는다. 그렇다보니 마이너스 성장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모두가 신종마이너스감염증 때문에 교인이 크게 감소했다고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그리고 헌금이 크게 줄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볼 겨를이 없다고 변명한다. 이런 사이 교회의 첨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돈의 흐름에 대한 감지능력이 뛰어난 사이비 목사만 늘어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단보다도 사이비화 된 목사가 무섭다고 말한다. 교회는 이상한 단체가 된지 오래되었다. 신천지보다도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자신의 아방궁을 지키기 위해 이웃종교에서 찾아온 새 신자를 접근도 못하게 한다. 등록하면 몰아낸다. 이제 교회들은 열심히 전도하지도 않는다. 과거 전투적으로 전도하고, 선교하던 교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면서 모두가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라고 핑계대기에 바쁘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교회되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은 당연하다. 국민들이 어려워지면 교회에 나온다는 말은 옛말이다. 그러나 미래로 나가는 교회,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교회는 계속해서 부흥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 여주 J교회 담임 M목사는 세상이 어려워지면, 상담을 요청하는 교인의 수는 늘어나고, 부흥하고 있다고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을 위해서 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았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서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그렇다 교회는 자신의 주장과 관심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서 기쁨과 보람을 얻는 신앙공동체이다.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교회를 파괴하는 적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탐욕과 맘몬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초대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살았다. 선교초기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시대의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수탈하는 고리대금을 금지하는 교회법도 제정했다.

교회는 우리의 생각과 뜻을 드리고, 몸까지 받치는 곳이다. 우리의 삶의 원천이며, 목적인 하나님에게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이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탐욕과 맘몬에서 벗어나 기도한 만큼, 행동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듯, 섬겨야 한다.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가 받은 작은 달란트를 이들을 위해서 사용할 때,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삶이 허락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 모두는 기도하며, 기도한 만큼 행동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사상에 빠져 고난당하는 이웃을 멀리했다. 이 선민사상은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이웃의 아픔을 모른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죄인으로 취급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현장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곳에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과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리스도의 발자국 소리를 듣기 위해 청아한 귀, 예수 그리스도의 보기 위해 청명한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감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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