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미지

떨어지는 무게는 
잴 수 없다

가을의 저울로 재기 전엔
중량은 미지수다

눈금에 새겨지는 
순금의 순도
그런 무게와 빛깔쯤으로
낙엽은 진다

어쩌다 중량미달의 
낙엽 하나
그러나 그 속엔
가을의 무게가 들어 있다 

* 박진환 시인 : 문학박사 한서대학교 교수(역) 예술대학원 원장.  동아일보 신춘문예  《조선문학》 주간.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문덕수문학상 등

정 재 영 장로
정 재 영 장로

먼저 시어는 은유라는 걸 서로 동의하여야 한다. 일단 낙엽은 비유이고, 시인이 원래 뜻(本意)은 숨겨두고 낙엽으로 둘러대서 말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 

문학 용어로는 본의를 원관념이라 하고, 비유로 동원된 사물인 낙엽을 보조관념이라 한다. 시어가 창조성을 중요시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멀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본래 말하고자 하는 것과 아주 동떨어진 사물이나 사건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상관 사이가 연관성이 떨어질수록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성공적인 작품은 긴장미를 말한다. 이 긴장은 그 상관성의 거리에서 생긴다. 먼 거리의 객관상관물을 억지로 연결시킨 작업을 엘리엇은 폭력적 결합이라 했다. 그냥 연상이 되는 기능보다 억지로 상상하여 만든 새로운 정서적 기능을 만들 때 생기는 컨시트(기발한 착상) 기전을 위해서다. 쉬클블로스키의 낯설게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낯설다는 말은 일상의 언어 사용과 친숙하지 않은 비유라는 말이다. 즉 엉뚱하거니 새롭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 이론에서 용어는 달라도 모두 동일한 맥락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런 이론을 강조하는 시인이자 평론가인 분이 박진환 시인이다. 그래서 예시가 더욱 그런 이론의 바탕에서 창작된 것임을 전제하고 해설할 필요가 있다. 

낙엽의 이미지 즉 낙엽이 가지고 있는 형상의 내포된 친숙하지 않은 의미로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은 수명이 다해서 즉 폐품이 되어서 탈락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시인은 오히려 내면이 잘 익어서 그 무게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길거리에 날리는 낙엽을 쓰레기로 본 것이 아닌 가을까지 만들어진 충실한 삶의 결과물 즉 3연의 금값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 비유를 위한 사물이라면 통상 과일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일상의 이미지와 전혀 반대의 낙엽이미지를 차용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가을과 같은 시절에 나무와 분리된 삶을 사는 존재에 대한 가치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연처럼 중량미달로 여기는 삶을 사는 사람에겐 더욱 위로가 될 것이다.

융합시론에서 양극화의 융합성을 주창하는 것도 동일하다. 이 작품을 올리는 것은 원로 시인이어서가 아니다, 대가의 작품인 것을 실제로 볼 수 있어 감사하기 때문이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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