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 찾아 나서는 교회되자

예수님의 어리석은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 하나님의 참사랑이 담겨 있다. 또 여기에는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 기쁜소식(복음)이 담겨 있다. 보잘 것 없는 이웃을 위한 사랑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할 일이다. 인간은 잃어버린 자, 힘없는 자, 보잘 것 없는 자를 그대로 두고서 새 인간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참사랑과 생명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열리지 않는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상처받고 버림받은 자, 죽임당하는 힘없는 자를 외면할 때,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도 이웃들로부터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오늘 세계는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에 의해 힘없는 자들이 살해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다. 아무도 고난당하는 이들의 한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보니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는 강자와 부유한 자, 탐욕과 욕망에 길들여진 자들의 악행만 보인다.

예수님의 평화(샬롬)를 말하는 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님보다도 높은 자리에 앉아 사이비 교주 노릇을 하기에 바쁘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참사랑=기쁜소식)을 상실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 세계는 어둠에 갇혀 있다. 언제 어디에서 핵전쟁을 일으키는 미치광이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다. 오늘 세계민족, 아니 그리스도인들은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긴다.

모두가 로마 팍스를 외친다. 우상 강대국을 섬기면, 강대국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모두 잊었다. 힘없는 자, 잃어버린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방치하면, 공동체의 참된 토대는 무너진다. 공동체의 토대가 무너지면, 교회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소망도, 희망도 없다. 자기 안에 갇혀 자신과 가족에게 충성만 한다. 이들은 하늘의 보화를 잃어버릴 것은 뻔하다.

오늘날 교회들은 잃어버린 자를 방치하면서, 생명력도 잃어버렸다. 교회의 토대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잃어버렸다. 한사람의 아픔을 동정하지 않는 공동체, 전쟁과 기아로 고난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몰각한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이며, 생명력을 상실한 공동체이다. 나의 마음을 열어 너와 그를 받아들이지를 못해, 상처받은 교인들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고, 실제 교회를 떠나 가나안 교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터부시 한지 오래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됐다. 보잘 것 없는 인간, 소외된 인간, 가난한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 힘없는 자를 잘 돌보는 것이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다. 이들을 돌보지 않고서 하나님나라에 가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사이비 교주 곳곳서 출현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한 세계의 평화는 없다

십자가 통해 나와 너, 그가 구원을 받는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인간, 정신질환으로부터 고통당하는 사람, 일본군 위한부로 끌려갔다가 한평생 한을 품고 살아온 이 땅의 소녀들, 전쟁과 기아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 안식일법과 정결 법을 지킬 수 없는 노동자들을 돌봐주고, 이들을 감싸 줄 때, 내가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참사랑이고, 복음이다.

지난 25일 대법원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을 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성매매 하는 매춘업에 종사하는 사람등으로 표현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교수에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오늘 우리사회의 일부 지식인과 보수적인 인사들은 이 교수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이 땅의 소녀들의 한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매춘부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것은 이번 판결에서 보여주었듯이, 약자를 보호해야 할 우리 법원과 사회도 한평생 한을 품고 살아온 약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한국교회 교인들이 있다는데 안타깝다. 소위 하나님의 참사랑을 말하며,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겠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일제하에서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을 산 이 땅의 소녀들을 폄훼하기에 바쁘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보면, 이들이 대한민국 사람인지. 아니면 일본사람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국민들은 곤궁한 삶에 처해 있는데,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에게 사죄한 어느 교회 권사의 행동은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고도 남는 행동이었다.

이런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을 보고서, 어느 누가 교회에 나가겠는가. 복음을 받아들이겠는가. 오늘날 교회는 이들에 의해 생명과 사랑공동체의 토대가 무너졌다. 이 권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적그리스도이다. 무엇보다도 참담한 것은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일부 기독교 인사들은 이 권사를 집회 때마다 이용하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모두가 이념에 갇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보다는 자신과 강대국에 충성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사이비 교주가 판을 치는 종교집단으로 변질됐다. 이 권사와 이 권사를 이용하는 군상들은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성경 속 진리를 상실했다. 그러면서 가식적으로 하나님의 참사랑과, 힘없는 자와 가난한 사람, 불행한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그리고 몇 푼 도와주고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랑삼아 말한다.

일부 목회자는 교인들 위에 군림하며, 교인들이 그 밑에서 조아리기를 바라는 사이비 교주가 된지 오래다. 오죽했으면 최삼경 목사가 천주교는 교주가 한명인데, 개신교는 교주가 몇 명인지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겠는가. 마틴 루터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교황을 향해 악취가 풍긴다,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의 주변을 맴돌며, 교황과 함께 권세를 누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승리하는 삶을 살지를 못했다.

승리하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전쟁으로 인해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함께 슬퍼하며, 이들과 함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전쟁과 기아로 인해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외면하면, 하나님보다도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는 부유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악취만 풍긴다. 이들은 새 인간으로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을 면키 어렵다.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사이비교주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권세를 누리려는 인간들로 인해 하나님의 참사랑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보니 가난한 자, 보잘 것 없는 자, 힘없는 자, 강도만난 자들은 어둠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말해주고 있듯이, 힘없는 어린아이와 병자, 부녀자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들을 돌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할 수 없다. 미래로 나갈 수 없다.

분당의 횃불교회(담임=이재희 목사)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불우한 이웃과 독거노인, 미혼모자, 해외의 어려운 이웃, 다문화가족, 불우청소년, 경찰 등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교회야 말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지구촌세계선교회 등의 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이 교회 교인들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을 통해 구원받고,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한국교회의 틀 속에서 경쟁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보다도 높아지려고 하는 군상들도 적지 않다. 구로구의 D교회의 목사는 동역자와 함께 헌금 나누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동역자인 여성목사는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의 여전도사가 은사가 있다며, 구로구 D교회에서 운영하는 훈련원에 보내 은혜를 받게 하고, 이 전도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55로 나누는 일을 벌여 구설수에 올랐다. 이 여성 목사와 D교회 목사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이비 목사이다.

이들은 성령을 방매하며, 성령을 망령되게 하는 사이비 교주 이상이다. D교회 목사는 박수무당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여성목사는 한국교회 뚜쟁이로 불리고 있다. 이 두 목사는 여러 부흥단체 뒤에 숨어 자신의 사이비성과 이단성을 감추기에 바쁘다.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자 명예훼손 등등을 운운하며, 자신의 잘못을 감춘다. 이들을 안수한 교단도 문제이지만, 목사안수를 반납해야 하는 적그리스도이다.

한국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탐욕에 길들여진 사이비교주이다. 이런 사이비교주들은 분명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이단보다도 못한 인간이며, 사이비이다. 그러면서 복음, 천국, !!, 성령을 말하며, 교인들을 미혹시킨다. 이들은 버려진 인간, 보잘 것 없는 인간, 고난당하는 이웃을 통해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군상들이다. 복을 내세워, 천국을 내세워 교인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기에 바쁘다.

이들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불쌍하다. 분명 사이비교주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쫓은 사이비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자기 안에 갇혀 하나님의 자리를 독차지 하려고 한다. 이단연구가들은 힘없고, 배경 없는 교회와 목회자를 괴롭히기 보다는, 이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연구하고, 이들이 바로 사이비교주임을 입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 십자가에 근거한 사랑의 공동체

교회는 십자가에 근거한 사랑의 공동체이다. 우리 모두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해당하는 인간, 버려진 인간을 통해 구원받고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힘없는 자, 보잘 것 없는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 한에 맺힌 사람들과 등을 진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자초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이는 또 하늘의 보화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부자들의 눈물을 닫아주기에 바쁜 교회는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십자가의 신앙을 잃어버렸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탐욕과 욕망에 길들여진 목회자들의 잘못된 목회관이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듣는 만큼 행동하지 않는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에 바쁘다. 그러다가 모두 보수주의에 떨어지고 말았다.

교회들은 첨탑을 높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오늘 교회는 잃어버린 자, 버림받은 자, 전쟁으로 살해당하는 자를 그대로 놔두고서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없다. 복음을 완성할 수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자와 버림받은 자, 힘없는 자, 한 맺힌 자들의 고통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 그러면서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외친다. 그리고 인류의 평화,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외친다.

한마디로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은 정반대이다. 기도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 기도는 허공을 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 나와 가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다보니 하나님나라의 주인인 전쟁과 기아로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해도, 한 맺힌 자들이 하늘을 향해 호소해도,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다가 하늘의 재물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충성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나와 교회, 사회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망각했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신앙공동체이며, 사랑의 공동체이다. 이런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고,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교회,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교회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 미래로 나갈 수 없다.

교회, 잃어버린 자의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실현할 수 없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교회,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교회, 자기들 가운데 안주하는 닫혀진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힘없는 자와 보잘 것 없는 자,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일하러 나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노동자, 일제의 희생양이 된 이 땅의 소녀들의 하늘을 향한 호소를 듣지 못한다. 오늘날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공동체(교회)가 됐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 침묵과 아첨으로 사이비 교주를 높여주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는 강대국을 섬기기에 바쁘다. 그 주변에서 함께 권세를 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이 진리하고 말하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이 엄연히 우리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오늘날 교회는 교황에게 충성하던 중세교회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모두가 사이비 교주와 함께 권세를 누리려고 한다.

힘없는 자, 가난한 자, 보잘 것 없는 자들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없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교회가 됐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과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망각했다.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교회가 됐다. 이로 인해 교회의 토대, 하나님의 참사랑의 토대,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교회마다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지를 않는 교회가 됐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모두가 신종마이너스감염증 때문에 교인이 크게 감소했다고 변명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헌금이 크게 줄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볼 겨를이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빚을 내, 십자가 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인다.

이런 사이 교회의 첨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돈의 흐름에 대한 감지능력이 뛰어난 사이비 목사와 교주만 늘어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단보다도 사이비 교주가 더 무섭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교주는 교황 한 명뿐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최삼경 목사의 말대로 교주가 몇 명인지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단의 교인보다도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자신의 아방궁을 지키기 위해 이웃종교에서 찾아온 새 신자의 접근을 막기도 한다. 등록하면 몰아낸다. 이제 교회들은 열심히 전도하지도 않는다. 과거 전투적으로 전도하고, 선교하던 교회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과거 초대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백정, 부자의 농토에 붙여먹고 살던 소작농민 등을 참아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교회되자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지를 못한다. 국민들은 세상이 어려워지면 교회에 나온다는 말은 옛말이다. 그러나 미래로 나가는 교회,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교회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계속 부흥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 여주 예루살렘교회 담임 문제선 목사는 세상이 어려워지면, 상담을 요청하는 교인의 수는 늘어나고, 덩달아 교회도 부흥하고 있다고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을 위해서 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았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서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그렇다 교회는 자신의 주장과 관심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서 기쁨과 보람을 얻는 공동체이다.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교회를 파괴하는 적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새 인간이 될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지 않는 종이다. 대신 나와 가족을 위해서 충성한다. 이러다가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보화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탐욕과 맘몬에 길들여진 결과이서 비롯됐다. 초대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살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나와 자신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생활공동체였다. 선교초기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시대의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수탈하는 고리대금도 금지하는 교회법을 제정했다.

교회는 우리의 생각과 뜻을 드리고, 몸까지 받치는 곳이다. 우리의 삶의 원천이며, 목적인 하나님에게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이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탐욕과 맘몬에서 벗어나 기도한 만큼, 행동하는 종교단체, 사랑의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듯, 섬겨야 한다.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가 받은 작은 달란트를 이들을 위해서 사용할 때,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삶이 허락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 모두는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죽어가는 힘없는 자의 아우성 소리를 들을 수 있게 귀를 활짝 열어야한다. 또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기도한 만큼 행동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사상에 빠져 고난당하는 이웃을 멀리했다. 이 선민사상은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이웃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힘없는 자를 죄인으로 취급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서 처형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우리는 전쟁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이웃을 그대로 놔두고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할 때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현장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곳에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과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리스도의 발자국 소리를 듣기 위해 청아한 귀, 예수 그리스도의 보기 위해 청명한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나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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