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정리하다가 약 십여 년 전의 영화 ‘늑대소년’의 한 대목에서 동공이 멈췄다.
폐병을 앓는 ‘순’이는 가족과 함께 요양 차 한적한 시골 마을로 이사한다. 그들은 예전에 ‘이리’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죽은 교수의 집에 살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마을 식구가 생겨 좋아하지만, ‘순’이는 지저분한 시골 마을 사람들이 탐탁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상 거지꼴을 한 소년을 발견한다. 소년은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고, 말도 하지 못하며, 먹는 것 외엔 관심이 없다. 그는 흡사 개와 비슷하다. ‘순’이 엄마는 소년을 ‘철수’라 부르며 잠시 그들은 함께 살게 된다.
‘순’이는 ‘철수’를 마치 개를 훈련하듯 가르친다. 언어는 “기다려!”이다.
그리고는 밥을 먹을 때, 수저를 쓰는 법, 양치하는 법, 옷을 입고 글을 쓰는 법, 말하는 법 등을 차차 가르쳐준다. 소년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관심의 표현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철수’는 ‘순’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폐병 환자로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온 소녀와 전쟁용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정부의 실험 대상으로 만들어진 ‘늑대소년’은 그렇게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평화는 곧 깨지고 만다. ‘순’이를 짝사랑하지만 뒤틀린 ‘한지태’의 등장으로, ‘철수’는 분노한 나머지 ‘늑대인간’으로 돌변한다. 그 분노는 체온 46도, 혈액형 판독 불가, 골밀도 측정 불가. 그 사건으로 ‘순’이는 ‘철수’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떠난다. 그의 침상엔 “기다려 나 다시 돌아올게” 쪽지 한 장.
47년이 지났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이제는 할머니가 된 ‘순’이는 시골 마을을 다시 찾는다. 추억에 잠겨 하룻밤 머물고 가게 된 ‘순’이는 ‘철수’가 갇혀 있던 창고 방에서, 놀랍게도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여자만을 기다리고 있던 늑대소년 ‘철수’를 만나게 된다.
작금의 우리는 불의를 보고도 분노(의분)할 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우리가 행하는 불의까지도 은혜라고 포장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가지 않는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왜곡, 변개, 혼잡게 하면서도, 지식과 능력을 겸비했기에 출세하고 성공했다 하지만 계산적이며, 이기주의적인 영화 속의 ‘한지태’와 동류의 사람들은 ‘순’이가 던진 “네가 뭐라 하든 상관없다”하는 말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비굴하고 추하게 살아가면서도 그 추함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순’이가 노령에 추억을 더듬고 있을 때, 그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늑대소년’을 향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한 편의 영화로 닫아 버릴 수가 없어서 잠시 침묵하였다.
‘그리스도인’이기에 “기다려 내가 다시 올게”라는 말에서 ‘심판 주’로 오실 예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몇 년, 몇 달, 몇 날이나 믿고 갈망하는 삶을 살았을까?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잊고 살았기에 갖가지 추악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성도(聖徒)라는 자만에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네가 ‘늑대소년’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아니 혹시 “너는 늑대가 아니냐”하고 물으신다면 “저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 ‘심판 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갈망하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아뢸 수 있을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