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곤충과 이끼와 새의 집
가로수,
길 위에 서있지 않다면 불리지 않을 이름


악기와 책 혹은 장작이 될 수있다
산 채로 불탈 수 있다

의지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다음의 시간도 미래여서
길은 계속 되고

아코디언처럼
잎들이 바람을 품었다 뱉을 때

새와 재와 눈앞의 길이 흩어진다

어디에 내려앉아도 좋다 비처럼
부서질 수 있다면

짙푸르게 자라는 이름을 떼고
이 세계를 향해 해머를 들고

집은 지을 때보다
부술 때 더 큰 소리를 낸다

어둠과 빛이 번갈아
잎사귀를 덮고 잠든다
꿈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나무는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고

잠 깬 빛과 어둠 아래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사람들이 줄지어 나간다

-동인지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김유자 시인:
충주출생. 《문학사상》 등단. 시집 : 『고백하는 몸들』 『너와 나만 모르는 우리의 세계』 등

정 재 영 장로.
정 재 영 장로.

시는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다. 이 작품에서는 가로수를 새롭게 보고 실존에 대한 담론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즉 가로수는 새로운 해석에 대한 엘리엇의 객관적상관물로, 객관적 시각으로 보려고 동원한 사물이다.

 그럼 가로수는 무얼 비유하고자 하는 걸까. 즉 함의는 무얼까.

첫 연을 기대어 상상으로 유추해 본다면 그것은 일상의 상황에서 분리된 존재다. 정원에도 여러 종류 나무가 있다. 동일한 종류의 나무라도 정원에 있으면 정원수로 불린다. 제목에서 나오는 가로수는 가로길에 있기 때문에 가로수라 불린다. 그 나무는 모양이나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길가에 있어야 한다. 그 종류에 따라 악기용 재료나 종이 만드는 펄프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나오는 그것은 아침이나 밥이나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 존재할 때 그 목적이 있음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3연에서 지적하듯 존재는 자기 의지와 관계없는 한계성을 말하기도 한다. 빗방울처럼 존재 자체가 부서져 사라진다 하더라도 가로수의 존재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논리다. 사람에게 대비해본다면 가로수는 세계를 향한 사명을 가진 존재다. 해머는 부숨의 역할을 한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선도적 책임을 가진다. 당연히 조용하지 않다. 새로움의 창조는 타인에게 알리는 반응이 큰 것이다. 즉 개혁 정신과 같은 것이다. 역사란 10연에서 드러낸 것처럼 반복적 운동성을 가진다. 그 반복성을 통해 발전한다고 말한다. 특정 장소에 있는 정원수와 달리, 가로수는 불특정 다수들이 지나다니는 장소에 존재하고 있는 보편성의 진리를 보여주려는 인식이다.

 이 작품 선정의 동기는 전제한 것처럼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을 보고 새롭게 해석하는 특징을 작품으로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어 박수를 보내고 싶어서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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