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로다

12월 성탄의 계절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트리가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성탄특수를 노리는 상인들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금년도 성탄의 계절은 탐욕과 지배, 소유하려는 욕심 많은 인간들 때문에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성탄의 계절, 한편에서 성탄절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충성하며, 술과 환락으로 즐기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피의 소리가 사무치고 있다.

2023년 성탄절, 낮은 자로 오시는 예수님은 어디에 오실까(?) 호화로운 백화점과 웅장한 교회당에 오실까. 자유와 평화, 민주를 내세워 힘없는 나라를 침략하는 욕심 많은 강대국과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충성하는 군상들에게 오실까.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 전쟁으로 살해당하고, 살해 위험에 노출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터인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 기아로 굶어죽는 아프리카 빈민촌,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오시지 않을까.

전쟁과 기아로 고난을 당하는 피조물들을 생각하면, 정말 예수님은 오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성경은 아기 예수의 탄생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했다. 성탄의 계절,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해당하는 이웃나라 백성, 밥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아프리카 백성, 정결법과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는 노동자, 교회마저도 꺼리는 노숙자, 이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르고 있다.

이들은 하늘을 향해 평화를 절규한다. 하나님은 이들의 절규를 듣고 살해당한 네 동생(이웃)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를 향해 묻고 계시다. 분명한 것은 이들을 그냥 놔두고서 다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수 없다. 성탄절을 기다릴 수도 없다. 여기에다 그리스도인 모두는 관념에 사로잡혀 팔레스타인은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강대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이스라엘 유대 백성은 좋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힘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당해 왔고, 당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찰하지 않고서는 고난당하는 팔레스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힘없는 자들이 살해당하고 있음에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로마팍스,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친다.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어디에서도 팔레스타인을 도와주자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강대국들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무기 계발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배욕과 탐욕에 길들여진 제3세계 국가의 지도자들은 세계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려, 무기를 구입, 자신과 측근, 가족의 아성을 쌓는데 탕진하고 있다. 이 빌린 돈은 가난한 백성들이 갚아야 하는 돈이다. 생산된 무기는 어디엔가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파조물,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무기판매업자들의 로비경쟁도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약한 자 그대로 두고 성탄절 기다릴 수 없다
로마팍스(평화), 인류모두 공멸의 길로 이끈다

힘없는 자들과 함께하는 성탄절

전쟁은 무기상만 살찌우고, 피조물들의 삶을 처참하게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은 6.25전쟁에서 처절하게 경험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평화(샬롬)를 갈망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예수님의 평화, ‘샬롬이라는 단어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됐다. 대신 힘에 의한 평화, 로마 팍스를 입에 달고 살아간다. 아기예수의 탄생은 분명 힘없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가 주었다. 때문에 인류 모두가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악한 지도자, 욕심 많은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중단할 줄을 모른다.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며, 인류를 파멸로 이끌 새로운 무기 계발에 혈안이 되어 있다. 강대국에 맹종하는 제3세계국가들은 신무기구입에 경쟁을 벌인다. 무기경쟁은 인류 모두가 함께 죽자는 것이 아니고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모두 공멸하자는 것이다. 특히 남북한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무기경쟁을 멈출 줄을 모른다.

이것은 남북한민족도 공멸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에도, 남북한 민족이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길, 평화의 길은 그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념논쟁을 벌이며, 남한민족끼리, 영호남 간, 동서 간, 노사 간, 계층 간, 남녀 간에 갈라치기 하기에 바쁘다. 이러한 상태로는 다시 오실 아기예수를 맞이할 수가 없다. 전기 줄을 칭칭 감은 성탄트리를 보면, 아기 예수를 전기로 고문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오늘 돈의 흐름에 대한 감지능력이 뛰어난 일부 목사·장로들은 기독교의 성지인 종로5가를 범죄자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종로5가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들이 바로 로마 팍스, 아메리카 팍스,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는 군상들이다. 이로 인해 종로5가는 범죄자들의 소굴이 되었다.

이를 두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지낸 전광훈 목사는 종로5가를 걸어 다니는 목사·장로를 향해 쓰레기들이라고 표현했다. 아담스미스는 정화된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감지 할 수 있다고 했다. 성탄절, 인간 모두는 겸손하고, 정화된 마음으로 아기예수를 기다려야 한다. 양심이 마비된 인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제도와 법에 모든 인간을 옭아매려고 한다.

이들에게는 인간성도, 사회성도, 역사성도 없다.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들이는 인간론적 관계성도 없다. 모두가 재물과 돈, 명예에 취해 하나님을 감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들을 보면,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 미래에 대한 소망이 보이지를 않는다. 성지로 불리던 종로5가는 이제 재물과 돈에 취한 목사·장로들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분열과 갈등의 온상으로 변했다.

한마디로 종로5가는 쓰레기를 내다가 버리는 쓰레기하치장이 됐다. 교회나, 정치권이나, 사회나, 모두 썩은 악취만 진동한다. 이들은 이념을 내세워 서로 갈등하며, 분열을 일삼는다. 한기총은 대표회장이 새로 선출됐음에도 주류와 비주류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돈만 외치는 군상들만 보인다. 자신들의 신앙에 맞지 않으면,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고 내쳐버린다. 이제 화해 할 수도 없다. 모두가 생명의 양식을 잃어버렸다. 종로5가에 둥지를 튼 군상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하늘의 보화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노예로 살지 말고 자유민으로 살라

그래서 어느 목사는 범죄자들의 소굴인 종로5가에 나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상태로는 다시 오실 아기예수를 맞이할 수 없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사무친다. 곤궁한 자영업자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친다. 여기에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경제는 말이 아니다. 문을 닫는 가게와 교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부도, 정치인도, 종교인도 믿을 수 없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가장도 적지 않다. 이들을 그대로 놔두고서는 성탄절을 맞이할 수 없다.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인류 모두는 전쟁과 기아 등으로 곤궁한 삶을 살고 있다. 노숙자와 어르신에게 희망이었던 밥상공동체는 문을 걸어 잠갔다가, 요즘 여는 밥상공동체가 간간히 보여, 그래도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고 있다.

모두가 힘든 성탄의 계절, 추운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명예와 권력, 맘몬에 길들여져 악취만 풍기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교회가 세상보다도 못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정치인들은 지배욕과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정쟁을 일삼으며, 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피조물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살아가는 군상들이 아닌가.

이제 세계는 이 최고인 시대가 됐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미겔>은 콜럼버스로 시작된 세계화 500년 특집에서 기독교 선교를 뛰어 넘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승리를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 달러이다.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크램린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 보편문명이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오늘 세계는 돈이 승리했다. 힘없는 자를 위로해야 할 교회는, 오히려 이들을 비난하기에 바쁘다. 일부 목사와 교인들의 입에서는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로 2차 가해를 자행한다. 이웃의 아픔을 모르는 교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성탄의 기쁨을 누릴 자격도 없다. 모두가 관념에 빠져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교인과 국민들에게 미래의 꿈을 심어주는 것도 아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을 보면서, “이슬람교도인 하마스는 망해야 한다고 저주하는 그리스도인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들도 겉으로는 하늘의 평화와 하나님의 참사랑을 말한다. 이중적인 모습이 아닌가. 어느 목사는 ‘2030 세계박람회 부산유치 기도대성회설교에서 이웃종교인 이슬람국가인 사우디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결과는 이 목사의 설교내용대로 되지 않았다.

결과는 사우디가 2030 세계박람회 개최국으로 선정됐다. 이 목사는 분명 사회성과 역사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충성하는 감독병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이웃종교와의 갈등이 발전해서 종교전쟁을 일으킨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고 살아간다. 성탄의 계절을 맞은 우리는 고난당하는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나의 아픔과 슬픔으로 받아드리고, 즐거워하며 다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려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복음이다

그것은 성탄절이 인류 모두의 명절이며, 슬픔과 좌절한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가 주기 때문이다. 아기예수의 탄생은 복음이다. 기쁜 소식이다. 혼자만의 성탄절이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하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늘에는 영광이며, 땅에는 평화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과 기아로 고난당하는 민족, 한사람을 위해서 충성해야만 하는 북한동포, 그리고 자유라는 이름 아래서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기쁜 소식이며, 평화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탄생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다.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술과 환락 속에서 본능을 발산하는 성탄절로 착각하고 있다. 자신의 욕정을 발산하며, 타락의 늪으로 빠져든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도 탐욕에 가득찬 인류에게 경고라도 하듯, 요술을 부려, 변종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다.

어느 여성 목사는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은 혼돈에 빠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코로나혁명을 일으켰다고 직격했다. 그렇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혼란의 중심에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서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성탄절의 뜻을 되새기며, 정화된 마음으로 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축하해야 한다. 요즘 자유라는 말처럼 회자되는 말도 없다.

예레미아 237절과 8절을 보면,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이스라엘 민족에게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 땅에 거하는 모든 민족을 자유민으로 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남한민족의 하나님이며, 북한민족의 하나님이다. 팔레스타인의 하나님이며, 우크라이나 백성들의 하나님이다. 세계민족 모두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그 대신에 이스라엘 집의 자손이 쫓겨 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고향 땅에서 살 것이다

자유인은 성탄절을 기다린다

오늘날 종교의 자유를 집단화하는 것은 맹종이며, 사이비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자유를 외치는 인간들이, 한 인간을 맹종하며, 이단에 빠지는 것을 쉽게 본다. 노예습성을 지닌 이들은 자율성이 없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억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집단적인 억압을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경험했다. 오늘 일본은 식민지시대에 누렸던 당시를 기억하며, 이웃나라 국민들을 아무렇게나 대하려고 달려든다.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며, 이웃나라 영토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정치적으로 악용한다. 한국인 여행객이 머무는 여관방에 욱일기천황만세의 글을 걸어놓는다는 보도를 접하며, 피압박민족으로 살아온 우리는 일본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을 용서하되 잊지는 말라는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말은 허울 좋은 소리 불과하다. 하나님을 배신한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교묘하게 넘기려는 술수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들은 국민들의 아픔, 치욕적인 역사를 몰각한 자들이다. 국민을 노예취급을 하겠다는 지도자들은 슬픔을 겪는 자들에게 탄식도 못하게 한다. 자신을 향해 비판도 못하게 한다.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 한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노예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했다. 예레미아도 노예로 살지 말고, 자유민으로 살라고 했다. 우리가 살다보면, 자랑스러운 이웃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이웃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행을 겪고, 억압을 당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상실하고, 메시아사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고난을 당하더라도 행복하다. 기쁨이 흘러넘친다. 너와 나, 그리고 그가 서로 의지하여 함께 사는 평화의 길로 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사랑, 어리석은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민족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압박을 당하면서도, 일경의 총과 칼에 맞서 맨주먹으로 항거했다. 또 군사독재에도 맞섰다. 이런 가운데서도 권세를 가진 사람의 주변서 함께 권세를 누리려고 했던 교회의 일부지도자는 피 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 일제하에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배교하는 신사참배를 집단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분명 한국교회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 기쁜 소식(복음)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그러면서 이웃종교, 이웃교단을 정죄하는 일을 서슴지 않r도 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연약한 처녀의 몸에서 잉태했다. 좋은 자리는 욕심 많은 인간에게 다 내어주고, 짐승 곁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그렇다 예수님은 연약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신분을 가지고 태어난 예수님은 유대의 권력자, 로마폭정의 대치 점에 서서 사랑의 힘과 정의로 심판하고,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성탄절은 인류를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은 힘 있는 자들에게는 당황스럽고 두려운 날이 되고, 고통과 슬픔에 잠긴 자들에게는 희망과 기쁨의 날이 되어야 한다.

2023년 성탄절, 우리 모두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 속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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