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열 목사.
김근열 목사.

모두가 종교의 자유를 말한다. 헌데 종교, 특히 개신교는 종교를 집단화하는데 형안이 되어 있다. 종교의 집단화하는 한마디로 맹종이며, 사이비와 다르지 않다. 종교를 집단화시키면서, 이단사이비가 만들어지고, 만들어졌다. 집단적 종교의 자유를 외치는 인간들은 한 인간을 맹종하며, 이단에 빠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노예습성을 지닌 이들에게서 자율성을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억압하며, 맹종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집단적인 억압을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경험했다. 오늘 일본은 식민지시대에 누렸던 당시를 기억하며, 이웃나라 국민들을 아무렇게나 대하려고 달려든다.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며, 이웃나라 영토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정치적으로 악용한다. 한국인 여행객이 머무는 여관방에 ‘욱일기’와 ‘천황만세’의 글을 걸어놓았다는 보도를 접하며, 피압박민족으로 살아온 우리는 일본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을 용서하되 잊지는 말라”는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말은 허울 좋은 소리 불과하다. 하나님을 배신한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교묘하게 넘기려는 술수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들은 국민들의 아픔, 치욕적인 역사를 몰각한 자들이다. 국민을 노예취급을 하겠다는 지도자들은 슬픔을 겪는 자들에게 탄식도 못하게 한다. 자신을 향해 비판도 못하게 한다.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 한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노예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했다. 예레미아도 노예로 살지 말고, 자유민으로 살라고 했다. 우리가 살다보면, 자랑스러운 이웃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이웃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행을 겪고, 억압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상실하고, 메시아사상을 몰각했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고난을 당하더라도 행복하다. 기쁨이 흘러넘친다. 너와 나, 그리고 그가 서로 의지하여 함께 사는 평화의 길로 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사랑, 어리석은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민족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압박을 당하면서도, 일경의 총과 칼에 맞서 맨주먹으로 항거했다. 비폭력 평화운동을 벌였다. 또 군사독재에도 맞섰다. 

이런 가운데서도 권세를 가진 사람의 주변서 함께 권세를 누리려고 했던 교회의 일부지도자는 피 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 일제하에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배교하는 신사참배를 집단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분명 한국교회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 기쁜 소식(복음)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그러면서 이웃종교, 이웃교단을 정죄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연약한 처녀의 몸에서 잉태했다. 

좋은 자리는 욕심 많은 인간에게 다 내어주고, 짐승 곁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신분을 가지고 태어난 예수님은 유대의 권력자, 로마폭정의 대치 점에 서서 사랑의 힘과 정의로 심판하고,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성탄절은 인류를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은 힘 있는 자들에게는 당황스럽고 두려운 날이 되고, 고통과 슬픔에 잠긴 자들에게는 희망과 기쁨의 날이 되어야 한다.

군남반석교회 담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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