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자

구랍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2024년 갑진년 새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우리 모두는 미래로 나가기 위해 범죄 하는 발과 손을 끊고, 모든 유혹의 근원인 눈을 빼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신년새해를 맞으면서, 교회에 나가 여러 모양으로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꿈을 꾸었다. 모두 11일 새벽, 그 꿈과 소원이 이루어지를 하나님께 간청을 드렸다. 꿈을 가진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꿈은 안일과 쾌락, 탐욕과 욕망에 기초한 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사회는 자신의 안일과 쾌락,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나의 범죄를 덮기 위해서 이웃을 살해하는 사회가 됐다. 한마디로 오늘 우리사회는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음란한 사회가 됐다. 그것은 종교계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윤리적, 도덕적으로 건강해야 할 종교인들의 탈선은 곧 공동체를 망가트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모두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충성한다. 그렇다보니 사회는 분열될 수밖에 없고, 종교계도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어느 기독교단체는 대표회장 취임식을 가지면서 식대로 2억원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모두가 하나님이 받아야 할 열광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을 마구 사용했다는 얘기다. 한편으로 이 식대로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아니 작은 교회 목회자를 위해서 사용했다면, 한국교회는 그 만큼 성숙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독차지하려는 군상은 하늘을 향해 소리치는 이웃의 처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내가 우월하기 위해서 힘없는 자, 보잘 것 없는 자를 짓밟아버린다.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충성한다. 이는 곧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두 자기에 대한 우상 숭배자가 됐다. 이들은 약한 자에 대해서는 강한 모습을 보이고, 강한 자 앞에서는 한없이 순한 양이 된다.

오늘 세계는 1인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약한 자들이 희생을 한다. 이는 공산주의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민주국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우리는 김정은 한사람을 위해서 북한동포 모두가 희생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해 왔다. 헌데 오늘 우리사회도 한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그것은 교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이제 교회는 집단화되어 가고 있다.

목회자 한사람을 위해서 교인 모두가 희생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종교의 집단화는 이단사이비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교회가 힘없는 자위에 군림하는 종교단체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교인들은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드릴 줄을 모른다. 자유와 민주라는 이름으로 살해당하는 이웃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전쟁을 일으킨 강대국에 박수를 보낸다. 이것이 바로 강대국, 힘 있는 자를 우상으로 섬기는 이단사이비이다.

시내산 일출(photo by_정서영)
시내산 일출(photo by_정서영)

사랑평화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빛의 사자가 되자
분열과 갈등, 반목 청산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자

혼자만의 군상은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한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있는데도, 귀가 막혀 이를 들을 수 없는 교회가 됐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도 감옥살이를 하는 이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외에는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상태로는 새로운 세상이 열었음에도, 우리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꿈도 이룰 수 없다. 새 인간이 될 수 없다. 이로 인해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한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세상에는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죄가 크다. 오늘날 범죄에 대하여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세대가 저지르는 추악한 범죄는 이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악의 결과이다. 온 인류는 모두 죄 아래 있다. 이 세대가 저지르는 추악한 모든 범죄들에 대해서 우리는 공범자이며, 자유로울 수 없다.

바울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에게 죄가 들어와 인류를 지배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허망한 꿈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 좀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모두가 정신없이 헤매고 있다. 돈이나, 지위가 참된 행복을 가져다가 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모두가 눈이 멀어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양심과 윤리, 체면을 돌볼 겨를이 없다.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분별할 수도 없다. 모두가 참된 생명, 참사랑을 잃어버렸다. 서로 물고, 뜯고, 미워하며,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기에 바쁘다. 오늘 서로 반목하며, 갈등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은 극명해진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온갖 편법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엄마찬스, 아빠찬스 등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했다. 그렇다보니 이들은 힘없는 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모른다. 오히려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자들 위에 군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나, 평안을 맛볼 수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완고하고 허망한 길에서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하나님의 참사랑과 진리를 잃어버렸다.

에베소서 419-20절에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19절의 말씀대로 이 세대는 분별력을 잃고 그들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 그대로를 예수님 안에서 배웠다.

때문에 우리는 낡은 인간성을 버리고, 새 인간성을 입어야 한다. 영이 새로워져서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본뜬 새 인간성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 인간성을 찾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섬기러 왔다. 옛 인간이 증오의 인간이었다면, 예수님은 사랑의 인간이었다. 사랑받을 수 없는 힘없는 자,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을 지극정성으로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는 힘없는 자속에서 우리를 부른다

십자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고난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지극한 하나님의 참사랑의 표징이다. 기독교가 타종교보다도 낫다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자, 힘없는 자를 사랑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오늘 사랑의 종교가 이제 나만을 위한 종교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모두가 자기 안에 갇혀 세상속의 힘없는 자,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 속에서 우리를 부른다는 것을 잊었다.

이제 교회도 끼리끼리 모이는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했다.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부자교회 목회자는 부자교회 목회자들끼리 모인다.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교인과 목회자는 소외감을 느낀다. 한국교회 성장의 중심에 있었던 소외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교회 역시 이들의 교회출석이 반갑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만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들로부터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배웠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생활현장서 실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탐욕과 욕망에 가득 차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분명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예수님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셨다.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스테반도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너를 사랑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한다”(갈릴지브란의 인간의 아들 예수중에)

갈릴지브란의 말대로 예수님은 너를 위해 너를 사랑했다. 이는 어리석은 사랑이다. 무조건적인 아가페사랑이다. 이 어리석은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다. 변화시킬 수 있다. 조건 없는 이 사랑만이 증오를 몰아낼 수 있다. 화해할 수 있다. 어설픈 사랑으로는 증오는 물러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속에서 불붙을 때 증오의 힘을 극복할 수 있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증오의 세력을 이길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랑, 무조건적인 아가페사랑만이 마음속에 뿌리깊이 내린 원한과 증오를 벗어버릴 수 있다. 그래야만 새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미래로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수 있다.

평화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되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화를 배웠다. 그럼에도 오늘의 세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친다. 로마의 평화는 창과 칼로 이룬 평화(팍스)이다. 이 평화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끊고 창과 칼로 이룬 평화이며, 압제와 수탈을 강요하는 평화이다. 하지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런 거짓된 평화를 깨고, 진정한 평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가득 넘치는 평화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가 주었다.

예수님 탄생했을 때 많은 천군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고 노래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산상수훈에 보면,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새끼를 탔다. 나귀새끼를 타고서는 전쟁할 수 없다. 예수님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문제는 모두의 입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창과 칼로 이룬 평화를 찬양하기에 바쁘다. 강대국들은 무기경쟁을 벌이며, 재래무기를 버릴 곳을 찾고 있다. 무기개발을 위해서 매년 수조달러가 소모되고 있다. 이 무기로 살해당하는 힘없는 자들이 수만, 아니 수십만에 이른다. 또한 강대국들이 전쟁 놀음을 하는 사이 남반부의 가난한 나라의 백성, 수 만 명이 영양실조나,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강대국을 찬양하며,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런 사이에서 앞서 지적한대로 한국기독교 모 연합단체가 대표회장취임식 식대로 2억원이상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몰각한 결과이다. 일각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랑한다면, 기독교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한탄의 소리를 낸다.

그리스도인들은 힘에 의한 평화, 칼과 창으로 이룬 평화, 로마팍스를 아무렇지 않게 외친다는데 참담하다. 분명 기독교는 평화(샬롬)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이다. 동시에 사랑의 종교이며, 화해의 종교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오늘 기독교 역시 욕심쟁이들에 의해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타종교와의 경쟁력도 잃어버렸다.

그렇다보니 남북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는 멀리 떠나버렸다. 서로 힘의 의한 평화를 외치며, 무기경쟁을 벌인다. 이는 곧 남북한민족이 공멸로 가는 길이다. 오히려 이웃종교가 평화를 위해서 봉사하며,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서 봉사한다. 민다나오 평화의 중심에 한국교회가 가장 크게 경계하는 이웃종교가 있었다는 사실. 한국교회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위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남을 위한 존재였다. 옛 인간은 자기만을 위한 존재였다면, 남을 위한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게 교육했다. 또 예수님은 빛의 자녀로 살라고 교육했다. 어둠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빛은 아름답다. 빛은 정의롭다. 빛은 불의한 것을 밝혀주고 몰아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빛의 사람으로 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못한 세상을 만들었다.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서자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감옥에 갇힌 바울의 기쁨에 잘 나타나 있다. 불행에 닥쳤다고 절망에 빠지고, 행운이 왔다고 오만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것이다.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단이다. 어느 교회의 목사가 교회 안에서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자. 마치 이것이 자신의 능령인양, 이웃교회 목사와 협잡해서 들어온 헌금을 나누는 것은 사이비 목사나 하는 짓거리이다. 원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데서 온다는 것을 모두 깨닫자.

새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회개). 허망한 욕심과 정욕을 쫓아가는 길은 사망에 이르는 길이다. 구조악 속에서 자기 안일에 삐져 사는 길을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파멸로 이끈다. 이제라도 증오와 죽음에 이르는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나 자신의 죄와 이 세대의 죄를 통회하는 눈물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가슴 속에 흐르는 통회의 눈물로 평화의 악수를 나누어야 한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맞이하자.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자리 잡으면, 내 마음도 새로워진다. 그리스도는 증오를 몰아낸다. 그리고 사랑으로 다스리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정욕에 속아 썩어져 가는 옛 인간성은 죽고, 새 인간성을 입게 되는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새 인간으로 거듭날 수 없다. 나의 절망과 오만은 낡은 인간인 나 자신의 그림자라는 것을 깨닫자.

내가 나의 그림자를 뛰어 넘을 수 없다. 이렇듯, 내 절망과 오만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닫힌 우리의 마음속에 절대로 머물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고통 받는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른다. 편견과 욕심 때문에 눈이 멀었던 이들을 보게 하고, 아집과 탐욕 때문에 막혔던 귀를 열어 이들의 울부짖음을 듣게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이들 사이 막혔던 담을 헐고, 화해의 악수를 나누게 한다. 2024년 갑진년 새해 우리 모두 남북한 간에 막혔던 담을 헐고, 남북한 민족이 화해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봉사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자. 그리고 기도하자. 이러한 만남을 통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으로,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자. 그리고 2024년 갑진년 새해 인류에게 사랑과 평화, 생명을 전하는 빛의 사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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