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혹은 -제로(Net-Zero)’운동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지키고, 숲을 가꾸기 위한 행동이 기독교계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총연합,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성공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등의 단체와 교단은 지구를 살리기 위한 탄소중립 실천운동을 벌여, 나름대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오늘 지구촌, 아니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인간의 탐욕과 소유욕, 지배욕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전으로 인해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이는 이상기온을 유발, 지구촌 곳곳에서 홍수, 가뭄, 폭설 등의 자연재해, 기근 등으로 이어져 매년 수십만 명이 굶어죽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온 현상이 일어나면서, ‘탄소중립이라는 말이 크게 회자되고 있다.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선진국들은 탄소중립, ‘-제로(Net-Zero)’운동에 끼어들었다. 그것은 오늘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크게 훼손된 것에 따른 대책이다. 탄소중립은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 증가를 막기 위해 인간 활동에 의한 배출량을 감소시키고, 흡수량을 증대하여 순 배출량이 제로가 되는 것을 탄소중립 혹은 -제로(Net-Zero)’라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파괴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복원하는데 수백 년이 걸린다는 예측도 나온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탐욕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복원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교란시킨 결과이다. 인간이 기대어 살아야 할 푸른 숲은 점점 사라지고, 사라진 숲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선진국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훼손한 하나님의 창조세계 복원에 후진국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후진국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 선진국들의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모두 선진국들이 만들어 놓은 재앙의 고통을 후진국들이 함께 분담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를 못한다.

선진국들의 탄소중립, ‘-제로(Net-Zero)’운동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계속해서 숲을 파괴하며,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키고 있다. 선진국들을 향해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지구는 이제 안전한 곳이 없다. 인간에게 평안을 가져다가 주는 푸른 숲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세상에 푸른 숲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삭막한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는 모두 인간의 탐욕, 지배욕과 소유욕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다.

폭설로 인한 사고로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 홍수로 인해 거주지를 잃고 힘들게 살아가는 피조물들이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 굶어죽는 피조물이 매년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이런 상황서 지구를 살리는 생명운동, 녹색교회운동, 하나님의 창조질서 복원운동, 탄소중립, ‘-제로(Net-Zero)’운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분명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인간이 관리하며, 기대어 살아야 하는 푸른 숲이다. 오늘 세계교회와 한국교회가 인간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푸른 숲을 조성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인간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전 세계가 기후환경 변화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한국교회가 먼저 창조질서를 보존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 세계가 기후환경 변화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한국교회가 먼저 창조질서를 보존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탐욕·지배욕·소유욕에 빠져 혼자만의 세상을 구축
, 생태계를 지탱하는 가장 기초적 생명의 양식

더불어 살아가는 숲을 조성하자

오늘 교회들은 탐욕과 욕망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바벨탑을 쌓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한 세상을 만드는데 방관자였다. 70-80년대 한국교회 부흥과 함께 중대형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면서 조성된 기도원 및 수양관은 이제 흉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됐다. 이 기도원과 수양관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슬리면서, 조성된 것들이다. 교인 감소와 함께 이러한 교회시설을 이용하는 교인도 크게 줄었다. 아니 아예 없다. 이것이 바로 탐욕에 길들여진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훼손한 결과로, 30년이 지난 오늘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들의 탐욕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욕심쟁이가 되어가고 있다. 욕심쟁이가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한다. 참담하다.

오늘날 지구의 종말은 예견하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오늘 한국교회는 더불어 사는 숲을 조성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위임받았다. 2024년 갑진년 새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숲을 만들겠다는 이들, 교회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사는 숲은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푸른 숲은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들이고, 함께 고통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로 향한 첫걸음이다. 오늘 교회도 생명과 사랑, 평화의 종교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더불어 살아가는 숲을 잃어버렸다. 이 가치를 이웃종교에 빼앗겨 버렸다.

모두가 탐욕과 욕망, 지배욕과 소유욕에 빠져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헤치고, 훼손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적대적 관계가 교회를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 우리사회는 너와 그는 없다. 나만 있다. 이로 인해 공동체는 해체되고, 더불어 살아야 할 숲도 파괴되고 있다. 숲은 인간 모두에게 평강을 가져다가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일부 목사들은 하나님과 자연, 인간과 자연,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설교 때마다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 들꽃을 보라고 했다. 타고르도 푸른 잎사귀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했다. 어느 시인은 저 푸른 들판을 보라고 했다.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교수는 더불어 살아갈 숲을 조성하라고 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갇혀, 메마른 삶을 살고 있다. 현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타고르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른다. 오늘 인간들은 자연과 단절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자연과 단절된 인간은 하나님의 질서에서 이탈해, 비뚤어진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살고 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과 같이 행복, 평강과 사랑을 가져다가 준다. 그런데 모두가 자연을 떠나 사막처럼 메마르고 난폭해졌다, 욕정을 채우며,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타락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떠나 무한한 탐욕과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모두가 사랑의 결핍을 느끼며, 삶의 보람을 잃어버렸다. 삶의 의미도 없다. 너와 그를 받아 드리질 못하고, 서로 갈등하며, 법과 제도를 만들어 반대파를 쳐 내기에 바쁘다. 그리고 자신들만을 세상을 구축, 하나님의 영광을 독차지 한다. 또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죽이고, 죽이는 세상을 열었다. 혼자만 잘살면 된다는 못된 생각이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간악해진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자

왜 인간들의 마음은 치유하지 못한 정도로 사악해졌을까. 이것은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충성하지 않고, 자신과 가족에게 충성한 결과가 아닌가. 또한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자신이 독차지 한 결과가 아닌가. 인간은 흙으로 창조됐다고 성경은 교육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흙에서 나온 곡식과 푸성귀를 먹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흙과 햇빛과 물과 바람, 푸른 숲, 나뭇잎을 만들어 냈고, 흑으로 창조된 인간은 흑으로 빚어진 자연물 속에서 그 자연물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떠나 살수 없다. 자연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가장 큰 창조적 선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하고 보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푸른 숲은 산소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이 산소를 마시며, 호흡하고 살아간다. 푸른 잎, 숲은 자연 생태계를 지탱해 주는 가장 기초적인 생명의 양식이다.

모든 초식 동물은 풀잎을 먹고 살며, 종족을 보전한다. 모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잡아먹도 살며, 종족을 보전한다. 모든 동물은 죽으면, 그 시체를 푸른 숲에 양분으로 내어준다. 이렇게 모든 생명은 서로 얽혀 있다.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이런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인간의 탐욕 때문에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인간이 기대어 살아야 할 숲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는 결국 자연재해라는 결과를 낳고, 이 재해로 인해 피조물들이 죽어가고 있다. 신종바이러스가 출현, 한 번에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인간의 면역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세계는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고통을 당했다. 인류 역사는 자유를 위한 혁명을 끊임없이 일으켰지만, 생명을 위한 혁명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 푸른 숲을 지키기 위해 코로나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자연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이런 경고에도 모든 생태계를 지탱해 주며, 이를 관리해야 할 인간들은 자연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자연은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가꾸고 관리하며,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푸른색을 띄고 있다. 숲도 푸른색을 띄고 있다. 푸른 숲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젊음, 영원한 순수성을 상징한다. 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늘도, 강물도, 바다도 푸른색을 띄고 있다. 때문에 푸른색을 띄고 있는 숲은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가 준다.

타협을 모르고 적대적 관계를 조성하는 한국교회는 진리는 푸르다는 말의 뜻을 모른다. 사계절 늘 푸른빛을 나타내는 솔잎과 대나무는 지조를 나타낸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붓으로 화선지에 대나무와 소나무를 담아 냈다. 푸른 잎으로 뒤덥힌 숲은 인간을 구원한다. 그렇다. 인간은 자연과의 화해,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 인간은 자연 속,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자연과 어우러짐으로써 자유롭고,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푸른 숲은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맑은 마음, 탐욕과 집착을 끊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길을 닫기 전에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숲은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꾼 숲에서 서로 기대어 살며, 자유롭고 평등의공동체, 그리스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탐욕과 소유욕이 가득하고, 폭력이 난무하며, 자신을 위해서 충성하고, 물신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저 들꽃을 보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진리를 가져다가 주는 숲을 가꾸자

들꽃은 욕심도 없다.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없다. 거짓을 말하는 일도 없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있는 그대로 놔두어도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핀다. 예수님의 들꽃을 보라는 말은 끝없는 욕망에 길들여진 인간, 끔직한 폭력을 행사하는 강대국의 지도자,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인간을 갈라치기 하는 종교지도자를 향한 책망이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예수는 권세와 부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너와 그를 모함하는 인간들에게 저 들꽃을 보라고 한다. 치열한 생존경재의 뒷전으로 밀려난 인간들,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인간들,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노동자, 일제 36년의 압제 속에서 시궁보다도 못한 삶을 산 이 땅의 소녀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해당하며,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인간들에게 저 들꽃을 보라고 한다. 전쟁과 폭력을 일삼는 강대국의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저 들꽃을 보라고 한다.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공동체를 해체하는 교회지도자들을 향해 저 들꽃을 보라고 한다.

불안과 초조, 걱정과 근심 속에서 우리의 삶은 위축되고 비인간화 되어가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서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한다. 교회도 기계에 의존해서 예배를 드린다. 사실 텔레비전의 광고나, 호화로운 백화점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1하며, 인간사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그렇다보니 인간들은 영혼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사랑도 평안도, 행복도, 소망도 없다. 실천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맹목적인 삶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모두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함께 권세를 누리는 비굴한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의 비굴한 삶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교회지도자들의 말과 행동 속에 그대로 배어 있다. 심지어 일부 지도자는 권력자에게 충성하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인간의 연약하고 비굴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런 인간들을 향해 예수님은 저 들꽃을 보라고 한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라는 말로 들린다.

저 들꽃을 보라’, ‘저 푸른 들판을 보라는 말은 자신에 대한 어리석고,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돼 주어진 대로, 생긴 대로, 있는 그대로 열심히 살라는 말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들꽃처럼 강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자신에 대한 번뇌와 집착을 끊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이를 망각한 인간은 저 들꽃을 보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저 들꽃을 보라는 말 속에는 그 만큼 십자가의 고난이 뒤따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길이 열렸다. 인류의 구원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은 자연과 인간이 결합될 때, 하나가 될 때, 합일을 이룰 때, 온전히 구원의 길이 열린다.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과 기아로 죽어간 피조물들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들 속에서 우리를 부른다.

어느 야당 지도자는 노동자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고난을 당한 국민을 폄하하며, 하찮게 여기다가 국민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이 야당지도자는 이들의 희생 위에서 꽃길만 걸었다. 이 야당지도자는 십자가와 푸른 숲에 담긴 의미를 잊었다. 십자가와 푸른 숲의 죽음과 들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부른다는 것을 잊고,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다. 십자가와 푸른 숲은 기쁜 소식, 복음을 우리에게 가져다가 준다. 인간 모두는 이제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푸른 숲을 가꾸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회복이며, 현재와 미래를 잇닿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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