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자본 축적, 하늘의 보화 상실

오늘날 우리는 세계화, 글로벌시대에 살고 있다. 모두가 자본의 노예가 됐다. 교회 역시 예수님의 세계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을 지키기 보다는 세계화의 악인 맘몬을 사랑하며, 자본(금융)을 축적하기에 바쁘다. 하나님의 자리를 돈(시장)으로 대치시켰다.

인류 모두는 신자유주의의 가치인 자본, 금융의 노예가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모두가 자본을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인간은 세계가 신자유주의로 개편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재물이 모이면 사람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사람이 모인다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재물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재물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금융은 교회에서도 보편문명이 됐다.

재물이 모이면 사람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사람이 모인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인간 모두가 욕심쟁이로 변해 사람보다 재물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재물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재물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 사형수도 감옥에서 빼낸다.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 재물은 소비형태의 재물이었다. 그리고 이웃과 나누며, 함께 어울려 살았다.

헌데 오늘날의 재물, 자본은 그 자체가 가치증식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과거 재물은 쌓아둘 수 없었다. 쌓아두면 썩어버린다. 반면 자본은 무한대로 쌓아둘 수 있다. 자본은 무한히 자기를 불려 나가는 본질을 갖고 있다. 그렇다보니 부정하게 축적된 수백억 원을 현찰로 집안에 쌓아두는 일이 벌어지고, 수십억 원을 횡령하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한 개의 계좌만으로도 무한히 쌓아둘 수 있는 것이 자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재물인 자본(금융)의 실체이다.

재물과 자본의 차이는 재물은 사용가치임에 비하여 자본은 교환가치이다. 재물은 사람을 위해서 쓰임으로써 재물은 자기소임을 다한다. 그러나 자본은 사람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과 교환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 한마디로 불려나가는 과정을 반복하고, 순환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의 재물, 자본은 진정한 인격으로서 사람을 불러 모으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가치실현이 좌절된 형장서 노동자가 겪는 갈등은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교회 안에서도 자본()이 없는 교인은 왜소해진다. 오늘날은 자본()이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세태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삶의 모든 영역 포괄하는 자유
그리스도인은 힘없는 자를 위해 저항하고 복종해야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 등장

재물이 흩어져야 사람이 모인다는 말은 재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삶의 이야기이며, 인간의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 자본의 노예가 된 세계는 나눔을 실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참사랑도 실현할 수 없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전쟁과 기아로 인해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모두가 망각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오늘날의 사회와 교회는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 들리지를 못한다. 모두가 나누지 못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남반부의 80%는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작은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북반부의 강대국들은 재물을 무기화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재물, 자본을 축적하기에 바쁘다. 대부분의 교회가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했고, 변해가고 있다.

이웃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겠다는 교회는 것의 보이지 않는다. 부자는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계속해서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금융, 자본은 악이 되었고, 인간은 자본의 노예로 전락했다.

인간적인 사회건설을 담보할 수도 없다. 나누지 못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는 한마디로 삭막하기 그지없다. 자본을 축적하는 인간들은 하늘의 보화를 잃는다는 것을 잊었다.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가난한 사람의 하나 남은 겉옷을 빼앗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 남은 겉옷을 빼앗고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교육한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이웃과 나누며, 서로 섬기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교육한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깨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상,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오늘날 인류는 자본, 금융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경제체제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가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나눔은 사회와 인간을 읽을 수 있는 가장 민감한 코드가 됐다. 우리는 나누지 못하는 사회에서 욕심쟁이가 되어가고 있다.

휴지조각을 팔아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 놓았다는 어느 할머니만이 나눔을 실천하며, 사랑을 나눈다는 삭막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고 있다. 모두가 자본을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 대신 돈을 사랑하는 결과를 연출하고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기자는 오늘날 사회는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고, 하나님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가 됐다. 또한 하나님의 성체는 달러이고,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며,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그렘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 보편문명이 됐다고 묘사했다.

그리스도의 자유 대신 자본의 노예

맘몬,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세계화를 옹호하는 자들은 세계화는 개발도상국도 축복이 될 것이다는 예언은 한마디로 빗나갔다. 세계화는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세계화는 자본시장의 길을 뛰어넘어,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를 지배하는 식민주의의 추한 얼굴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적은 돈으로 은행과 국민경제를 장악하며, 개발도상국과 저개발 국가 국민들을 여기에 옭아 멘다.

500년 전 콜럼버스가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라고 굳게 믿고 출발한 기독교 세계화의 꿈은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보편문명의 승리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맘몬이 승리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의 실체는 다수의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들의 자유를 박탈했다. 자본이라는 맘몬에게 자유를 허락한 인간들은 자유를 상실하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했다. 이것은 자본이라는 맘몬의 실제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과거에는 모두가 재물을 쌓는데 급급했다면, 오늘날 세계는 자본, 금융을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다보니 인간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자본, 맘몬의 노예로 전락, 인간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인간이 자본의 노예가 된 오늘날 세계질서는 서구 국가들에게 좋은 기회였다. 지난 25년 동안 경제를 활성화시켜 세 배 가까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자본 이동의 통제를 통해 통화의 안정성이 세계경제와 상품 무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고정 환율을 달러에 적용함으로써 달러에 무제약적 자유를 제공했다.

급기야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달러 통화를 과도하게 발행, 달러의 신뢰도를 추락시켰다. 그 결과 유럽연합은 달러에 예속된 고정 환율을 폐지하고, 자국 화폐의 자유를 선언했다. 유럽의 자국화폐 자유를 선언한 것과 관련해서 당시 미국 중앙은행 총재는 금융시장의 고삐가 풀려남으로써 전체 인류에게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가 줄 것이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경영인들은 경제적 범죄를 저질러도 법은 관대하기 그지없다. 이런저런 핑계로, 자본을 앞세워 빠져나가기 일쑤다. 반면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은 빵 하나를 훔쳐 먹고, 실형을 받는 것에 비교된다. 자본이 이렇게 자유를 구가하면서, 독일의 수상 슈뢰더는 투기자본이 전체 국민경제를 폐허로 몰아갔다고 지적했다.

인류는 세계적 경제와 국가적 정책 사이의 틈바구니에 서게 됐다. 하지만 세계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것은 자본은 국가통제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본이 국가를 통제하는 상태에 도달했다.

교회도 자본의 노예가 되었으며, 교인들은 하나님 대신 자본, 맘몬을 섬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목회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강단에서 외친다. 가난한 교인들은 자본가인 부자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와 달리 자본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몰려들고, 자본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축적하는데 교회 간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자본의 노예가 된 교회의 목회자는 자신이 성장시켜 바벨탑을 만들어 놓 은 교회를 생판 모르는 후임자에게 물려줄 수 없어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세습을 단행하고 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자유

이는 교회마저도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의해서 만들어낸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상을 왜곡시켰다. 중세시대 로마의 법체제와 봉건체제에 의지해 성직자 중심의 자기 완결적 권력체제를 구축했다. 완전히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근대 기독교, 계몽주의 신학 역시 복음의 본질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마저도, 자본주의적 시장의 자유와 혼돈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켰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고 선언했다. 루터의 이 선언은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대헌장이 되었다. 또 루터의 이 선언은 자유인과 종, 주인과 신하라는 사회적, 정치적 개념의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루터 이전에 주인이 있으면, 종이 있고, 종이 있으면, 주인이 있다고 했다.

루터의 자유 개념은 외적인간과 관계되어 있다. 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영의 자유를 말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인 내면성으로 제한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모든 세속적 권위와 대립되는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외적인 것이 아니며, 내적인간의 경건만이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영적인간, 혹은 내적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규정지었다.

외적인간을 세상 권위나, 체제에 순응하며,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루터교 신학자들이나, 보수주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종교를 개인적인 사안으로 규정하고, 순수하게 내적인 것으로 인정, 종교의 자유를 얻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세상에서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며,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루터의 내면적인 자유는 한마디로 독일인들을 사회적 책임과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스도를 기만하고, 사회적 책임,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에 대한 개신교의 잘못된 이해는 구자유주의, 부르주아를 거쳐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자본, 맘몬에 양도하고, 자본의 종으로 전락하게 했다. 루터가 설파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왜곡에 대한 재해석은 디트리히 본회퍼에 의해서 재해석됐다.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옥중서신 저항과 복종에 실린 글은 이를 대변한다.

저항과 복종 사이의 경제가 원칙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둘은 존중해야 하며, 결단을 가지고 파악해야 한다. 신앙이 그와 같은 동적이고, 생동적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때그때 현재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결실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저항과 복종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본회퍼의 말대로 순전히 영적, 내적 자유가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자유이다. 한국교회는 내적, 영적 자유를 추구하면서, 외적으로 신자유주의 사조에 저항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사랑하고, 섬겼던 보잘 것 없는 사람, 힘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대상은 권력자, 강한 자, 부자가 아니다. 전쟁과 기아로 고난당하는 자, 억눌린 자, 약한 자를 섬겨야 한다. 하나님은 무력한 분이셨다. 때문에 하나님은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섬기며, 이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그리스도교의 미래는 강대국에 의해 발생한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과 기아로 가난에 시달리며,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저항하고, 그들을 위해서 복종해야 한다.

로마서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존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지상에 정의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미래로 나갈 수 있다. 힘없는 자, 전쟁으로 살해당하는 아이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섬기지 않고서는 하나님나라운동에 동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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