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으로 장정을 한

심장으로 읽어라

못 다 운 울음
그 울림으로 쓰는

어느 축생의 후생기

- 동인지 『작은 詩앗 채송화, 독립서점』에서

정 재 영 장로
정 재 영 장로

가죽으로 표지를 만든 책은 성경임이 분명하다. 시인은 성경을 읽을 땐 생기는 감명 즉 심장의 울림인 북의 기능으로 변용하고 있다. 성경을 신체 울림인 맥박의 심장으로 읽으라 한다. 그 울음은 축생의 울음이다. 즉 인간 삶에서 발생하는 울음이다. 쉽게 말하면 성경을 읽는다는 건 거룩한 하나님 말씀이 축생 같은 인간의 북, 곧 심장을 두드리는 것이다.

시의 구조는 하늘과 축생의 만남이 가죽 책(성경)을 읽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형식을 가진다. 이 형식은 융합시론에 딱 맞는 것으로, 문학사적으로 17세기 존 던부터 유래한 형이상시의 특징이다. 이 짧은 시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신기하게도 명시는 대부분 이 이론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 동인지에 첨부된 부족한 제 글 일부로 재 확인해보자 한다.

융합시론은 17세기 존 던의 형이상시의 형식상 특성을 정리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작품들은 평론가들의 비아냥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비평학의 시인과 비평가들에 의해 인정받게 되어 활용되게 되었다. 엘리엇을 위시하여 랜섬, 리처즈, 테이트, 심지어 휠 라이트까지 그 창작방법론의 가치를 확인된 것이다.

간단히 그 이론을 말한다면 양극성의 이미지 동원이다. 앞 예시처럼 신과 인간의 만남 즉 융합이 심장이라는 북이다.

엘리엇의 폭력적 결합도 상반성의 거리에 있는 상상력의 영역을 의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말하낟. 시의 애매성(모호성 ambiguity)을 추구하는 것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숨기거나 함축하여 본의인 원관념을 분명하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이런 면에서 쉬클로브스키의 낯설게 만들기도 동일한 이론이다. 이 말은 응축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 응축을 위해 융합시는 이질적이고 상반성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융합시킨다. 시의 함축미도 설명 대신 오히려 숨긴 모습 즉 은폐시킨 언어로 사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시의 기본적인 생명이요 필수조건임을 이 예시가 잘 변증해주고 있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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