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자리를 독차지한 자본(금융)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가 인간의 가치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그것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아래 이루어지는 인간의 가치 황폐화는,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자본의 논리, 시장의 논리에 갇히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결국 관념이 되어버려 곳곳에서 적대적 관계가 조성되고 있다. 이런 상황서 성경의 경제정의인 나눔섬김은 오늘날 인간사회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가장 민감한 코드가 되고 있다.

나눔과 섬김은커녕, 목회자들 중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교회의 권위인 당회구성을 하지 않는 공동체가 허다하다. 또한 교인들이 줄어들면서, 교회간의 병합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교회 중, 한 교회를 팔아 은퇴를 앞둔 목회자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겠다는 얄팍한 생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교회가 살기 위해 두 교회를 통합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가 보면, 속셈은 다른데 있다.

모두가 신자유주의의 가치인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에 갇혀 버린 결과이다. 하나님의 자리를 자본(금융)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모두가 욕심쟁이가 되어 나누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서 죄인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그대로 두고서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교훈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장 큰 기쁨을 이웃으로부터 얻는다. 가장 큰 고통과 고난도 이웃으로부터 받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근본적인 것을 잊고, 숨 고를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이 인간적인 가치와 존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나누어야 할 것은 재물(금융)뿐만이 아니다. 자본(금융)은 근본적으로 나눌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나눔으로써 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나눔으로써, 용서함으로써, 사랑함으로써 기쁨이 배가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나누어 주어야 할 사람을 그대로 두고서,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나눔은 사랑이어야 한다. 모임은 봉사이어야 한다. 오늘 교회공동체는 사랑 없는 나눔, 봉사 없는 모임으로 인해 서로 갈등하며, 해체되고 있다. 분열되고 있다. 나눔과 봉사가 실종되면서, 교인의 수도 반으로 줄어들었다.

젊은이들과 힘없는 자, 약한 자들은 자본(금융)에 길들여진 교회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교회를 찾지 않는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런대로 지탱하는 것은 인간의 수명이 20년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교회는 갈수록 노쇠해지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이 때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놓아두고, 가시덤불, 벼랑 끝을 헤매셨다. 그러다가 잃은 양을 찾으면,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이웃들과 기쁨의 잔치를 벌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놓아두고, 가시덤불, 벼랑 끝을 헤매셨다. 그러다가 잃은 양을 찾으면,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이웃들과 기쁨의 잔치를 벌였다.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할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하라
이웃의 아픔, 나의 아픔으로 받아드릴 때 미래가 열린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라

농어민들이 삶을 위해 상경하면서, 대형교회들이 출현했다. 십자가만 세우면 교인들이 몰려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화, 선교명령에 따라 해외선교에도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사랑과 봉사는 인간적인 것, 그것 자체이다. 교회의 사랑 없는 나눔과 봉사 없는 모임은 인간적인 가치를 상실한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게 됐다. 나눔은 물질만의 나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눔은 나의 마음을 열어 너와 그의 아픔과 고통, 고난을 함께 공유하며, 가진 것을 나누면서 섬겨야 하는 것이다. 나눔은 우리사회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주고, 풍성하게 해 준다. 봉사하는 교회, 모임은 공동체를 강건하게 해 준다. 때문에 교회는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기쁨을 나누는 곳이 되어야 한다. 고통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이런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현장,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현장에 참여해야만, 새로운 세상, 미래가 열린다.

오늘 한국교회는 현재에 안주하면서, 하나님을 복 방망이로 악용하기에 바쁘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과거에서 헤어나지를 못해, 새로운 나라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지를 못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인간이 되었다. 자신과 가족에게 충성하는 인간이 되었다,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인간은 탐닉만을 추구한다. 욕심쟁이가 됐다. 하나님의 보화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잊고 살아간다.

사실 자본의 논리, 시장의 논리를 내세운 신자유주의에 길들여진 인간들은 모두 욕심쟁이가 되어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자신들이 독차지 한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할 수밖에 없고, 교회의 질서,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트리며, 마음대로 살아간다. 성서의 경제정의인 나눔도, 섬김도, 내 팽개치고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교회에 실망하고 떠난 교인을 찾지 않는다. 떠난 교인들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분명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자를 그대로 놓아두고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놓아두고, 가시덤불, 벼랑 끝을 헤매셨다. 그러다가 잃은 양을 찾으면,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이웃들과 기쁨의 잔치를 벌였다. 산술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참사랑(복음=기쁜소식)을 이 땅에서 실현하겠다고 말하는 한국교회는 기도한 만큼,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에 불과하다. 그래야만 유럽교회를 닮지 않고, 미래로 나갈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고난과 역경이 닥쳐야만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 속에서만이,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라가 어려우면 어진 지도자, 가정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를 생각한다.

아름다운 삶, 이웃으로부터 온다

그렇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삶, 가치 있는 삶은 이웃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라도 교회 밖의 잃은 양, 교회를 떠난 교인들을 찾아 가시덤불, 벼랑 끝을 헤매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찾으면,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즐거움과 고난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하고, 푸른 숲을 조성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참사랑을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다. 글로벌시대, 세계화시대, 국제화시대에 칭찬받는 교회가 될 것이다.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잃은 양,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해당하는 이웃나라 국민,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에 빠진 금융과 시장의 노리로 인해 고통당하는 제3세계 국민, 힘없는 자, 보잘 것 없는 자를 그대로 놓아두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이웃의 고통과 고난을 나의 고통과 고난으로 받아드릴 때 구원의 길, 하나님의 나라가 열린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는 부자나, 가난한자나,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생활공동체였다. 이 사상은 동구권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예수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지 않았다. 나눔과 섬김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나눔으로써 기쁨은 배가 된다

미국과 소련을 양극 점으로 전개되었던 자본주의 질서와 사회주의 질서, 냉전체제는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끝이 났다. 미국을 초극점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 자본과 시장을 내세운 신자유주의가 시작되었다.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새로운 질서의 틀이 만들어졌다. 오늘날의 세계를 글로벌, 세계화, 국제화시대라고 말한다. 자본과 시장은 그렘린까지 찬양하는 자본주의의 보편문명이 됐다.

또한 17세기 영국인들에 의해 세계의 질서가 형성됐다. 기독교의 세계화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위탁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이 말씀대로 세계화는 예수님의 마지막 선교명령이다. 이 선교 명령에 따라 기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벌여 왔고, 여전히 벌이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는 복음을 통한 세계화의 중심에 있었다. 기독교의 본격적인 세계화는 15세기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과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문명을 열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최초로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됐다.

콜럼버스는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을 쓸어버리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고 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을 되뇌며, 기독교 세계화의 꿈을 키웠다. 이는 식민주의, 제국주의 의제와 구체적으로 결합됐다. 자본과 시장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를 만들어 냈다. 그 결과 오늘 세계는 서구가 바로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처럼 변질됐다.

세계화, 예수님의 마지막 위탁

콜럼버스 이래 정복자들은 서구의 언어와 의복, 가치관, 관습까지 강요했다. 유럽 것이 문화라면, 대륙의 것은 민속이고, 유럽의 것이 종교라면, 대륙의 것은 미신이며, 유럽의 것이 언어라면, 대륙의 것은 방언이고, 유럽의 것이 예술품이라면, 대륙의 것은 민속품이 되었다. 한 마디로 유럽이 주도한 세계화는 대륙의 역사에 있어서 일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미국이 세계패권을 장악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질서가 열렸다.

갈레아노는 콜럼버스 이래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불복시킨 유럽인들은 다른 대륙의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언어로 말하도록 하고, 자기들의 옷을 입게 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가치관을 마음속에 심어 주었다고 말했다. 오늘날 의식주는 물론이고, 사고방식이나, 가치관까지 우리고유의 문화라기보다 서구적 약식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세계화가 다른 대륙의 민족에게 가져다가 준 여러 가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화, 국제화는 유럽문명의 연장선상에서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로 더욱 공고히 기초를 놓았다. 세계화의 과정은 유럽의 가톨릭 국가가 남미로 진출하여, 그 대륙을 지배함으로써 최초의 유럽식 세계화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이후부터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프로테스탄트가 여타의 세계를 재패함으로써 유럽의 세계화가 한 단계 진전됐다.

또한 유럽의 문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미국이 여러 진행단계를 거쳐 다양한 형태로 형성되었던 세계화를 총괄하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화, 경제 질서와 관련된 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세계화에 있어서, 크게 성장한 한국교회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세계화 역시 영미의 세계화, 영미의 세계선교에 갇혀, 한국교회와 피선교국에 맞는 선교활동을 벌이지 못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일부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굶주림에 지친 이웃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며,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고 있다.

한국의 일부 교회와 단체는 예수님께서 이들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들이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고 있다. 주님의 사랑 세계선교센터 원장 서사라 목사는 온갖 오해와 모함을 받으면서도, 인도를 비롯한 아프리카, 필리핀, 캄보디아 등의 가난한 나라 빈민가에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 선교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무렇게나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수십 개의 방과 후 교실을 운영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필수품 지원, 방과 후 교실을 매개로 한 교회개척 등은 한국교회가 경험하지 못한 선교활동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국가가 통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분당횃불교회 이재희 목사는 세계선교, 예수님의 세계화를 보다 효율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사단법인 지구촌 선교회를 조직, 몽골을 비롯한 캄보디아 등 제3세계, 그것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에 교회를 세우고,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의 선교를 실천하고 있다.

지구촌선교회는 국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눔과 섬김의 본을 보이고 있다. 지역사회의 소외된 어르신 지원, 지역 차상위계층 청소년 지원, 한부모가정 지원, 다문화가정을 위한 프로그램 진행, 경찰선교, 차상위 계층과 김장나누기 등이 바로 그것이며,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위탁한 기독교세계화에 헌신하고 있다. 이러한 나눔과 섬김의 선교활동은 연례적인 행사가 되었다. 교회재정의 상당부분을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위해 재투자하고 있다는데 주목을 받고 있다.

CRAM WORLDWIDE 대표 김상호 목사도 필리핀 빈민가에 교회를 세우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 미래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 한마디로 김 목사는 예수님이 부르는 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레이스실천사역전문연구원 원장 김록이 목사도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제1세계를 중심한 선교활동을 벌여, 피조물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고, 모든 교회가 분열과 갈등을 멈추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외치고 있다. 그래야만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글로벌에듀(이사장=소강석 목사)를 비롯한 월드미션프론티어(대표=김평욱 선교사), 여의도교회, WEM선교회(이사장=박요한 목사, 총재=원종문 목사) 등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등 한국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교회와 학교, 신학교, 병원 등을 설립, 남반부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세계화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양성, 적재적소에 파송하고 있다.

글로벌에듀를 비롯한 월드미션프론티어, 분당횃불교회, 김상호 목사, 그레이스실천사역전문연구원, 주님의 사랑세계선교센터 등은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인 세계화의 위탁에 따라 예수님이 계신 곳에 교회를 세우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 교회와 단체야 말로 예수님이 부르는 곳에 교회를 세웠다. 예수님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해당하는 세계민족, 굶주림에 허덕이는 남반부의 세계민족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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