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기미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5주년이 됐다. 191931일에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다.

당시 수많은 국민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함성이 도시와 농어촌을 가리지 않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민족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주와 자결의 자랑스런 상징과도 같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적인 민족자결주의의 흐름과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가 결합해 일어난 사건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일제의 강력한 무단통치와 탄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당시 일제는 우리의 국권과 자유를 박탈하고, 민족 고유문화와 언어를 말살했다. 그러면서 경제적 지배와 착취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저항하는 의병과 열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제의 잔인한 진압에 해외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숨어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14개 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됐다. 그걸 빌미로 191928일 일본 도쿄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문이다.

재일 유학생들의 독립 의지에 크게 고무된 국내 민족지도자들은 191931일 오전 11, 서울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당시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 종파의식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었다.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은 타 종교라도 배척하지 않고 단결과 단합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거국적인 운동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란 건 이 조그맣고 힘없는 나라의 백성 그 어디에서 그런 위대한 힘과 저력이 나왔나 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 정신 승리의 밑바탕에 기독교 정신이 깊숙이 내재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3.1운동을 기념하는 자세와 105년 전 그날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그날의 정신과 취지가 오늘날 점점 희미해지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도 각 기독교 연합기관과 단체들이 주최하는 3.1운동 105주년 행사가 도처에 계획돼 있다. 그런데 올해도 역시 제각각이다. 105년 전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 종교와 종파를 가리지 않고 연합했던 정신과 지도력은커녕 기독교 안에서조차 연합하지 않는 모습으로 무얼 하겠나.

한국교회는 이런 뜻깊은 행사를 치를 때마다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에 골몰한다. 그 의미보다는 격식과 내세우는 인물에 방향이 정해진다. 이런 행태는 종교를 뛰어넘은 연합의 모범을 보여준 3.1정신과 분명한 대척점에 있다. 이런 구태를 반복하는 한 과거 3.1운동에서 보여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희생정신, 그로 인해 받았던 국민적 존경과 신뢰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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