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환 목사.
김 명 환 목사.

교회를 중심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러난 1919년 3.1만세운동은 3천 년간 이어진 봉건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국가 건립의 개시를 알리는 운동이었다. 또한 3.1 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뒤엎고 대한민국의 건립을 알리는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1년에 걸쳐 한반도 전역과 세계 각지의 한인 밀집 지역에서 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점에 대하여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다.

한민족 최대 규모가 참여한 독립운동이며, 민족운동이고, 해방운동이다. 3.1만세운동 105주년을 맞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제국의 무단통치를 거부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민간과 지식인의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 전국적 시위로 발전했다. 시위가 끝난 뒤에도 그 열기는 꺼지지 않고 각종 후원회 및 시민단체가 결성되었고, 민족 교육기관,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등의 여성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 등의 무장 레지스탕스, 독립군이 탄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운동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연호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원년으로 삼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에게 대한제국이 강제합병당한 후, 조선은 일본 제국의 무단 통치에 신음하고 있었다. 교사들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했을 정도였다. 일본 육군 헌병이 경찰보다 훨씬 많이 주둔하는 헌병 경찰 제도로 집회와 단체 운동을 일절 엄금했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 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졌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평의회 의장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닌 역시 제국주의 반대의 일환으로 민족 자결을 주장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식민통치 아래 있던 세계 약소국가들 사이에서 민족자결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한마디로 식민통치 아래 있던 국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국에 유학 중이었던 신한청년당 당수인 여운형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돌아왔다.

일제의 실정이 반복되고 독립 열망이 고조되던 차에 1919년 1월 광무 황제가 사망했다. 반일 감정이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일본의 패권주의와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식민지세력에 의해 끌려간 정신대 할머니들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일본 우경화의 바람은 대한민국을 향한 또 하나의 침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대한민국 기독교 목회자와 교인들의 입에서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을 향해 내뱉는 막말은, 한 마디로 참담하다. 일본의 경제침략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는 인사도 있다. 모 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한 목사는 대중 집회에서 “일제시대 정신대로 끌려갔던 소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자원했다”고 막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냈다. 이에 300여명의 목사와 교인들은 일본의 만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멘’으로 화답했다.

한국교회 교인과 목사의 역사의식이 이 정도라면, 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바로 한국기독교의 목회자이며, 교인이라는데 부끄럽다. 누가 이렇게 막말을 내뱉고, 여기에 동조하는 교인들을 보고 교회에 나가겠는가(?)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의 이탈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일제 36년 동안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희생당한 애국자들의 ‘한의 소리’가 아직도 하늘에 사무친다.

소망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