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미래로 나가는 예수운동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를 듣고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와 수탈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억압과 착취가 없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세우라고 명 하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경 전체를 압도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와 착취에서 해방시켜주셨다는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사상이다.

이스라엘민족의 이 같은 신앙고백의 전통은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나님은 일제치하에서 고난당하는 한민족의 신음소리를 듣고, 해방시켜 주셨다.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3.1민족해방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저항운동이 빠르게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구약성경을 보지 못하도록 훈령을 선교본부에 내려 보낼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민족의 독립과 하나님나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강했다. 총독부에 협조적이었던 선교사들 역시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한 설교 및 성경공부를 철저하게 금지했다. 그렇다보니 선교사들은 구령사업과 교육사업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선교사는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싸구려 복음, 성령을 방매하기에 바빴다. 오죽했으면 당시 미국장로교 해외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목사는 한국교회를 순회하면서, “한국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한국교회 교인들이 걱정 된다고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밝혔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교사들의 선교는 한마디로 피선교국 백성들의 고통과 고난을 몰각하고, 제국 서양문화를 그대로 이식시키는데 바빴다. 이들 선교사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예수님의 삶의 현장인 한민족 속에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쳤다. 이런 선교사들의 선교형태는 한국교회에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선교를 원리주의와 정통주의, 근본주의 신학, 신민지 신학에 갇히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 한국교회의 3.1절 행사는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기층민중과 기독농민, 기독여성, 학생들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크게 벗어났다. 스스로 민족대표를 자처한 33인을 기념하는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한민족을 해방시켜 주면서, 압제와 수탈이 없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고 명 하셨다.

이는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라면, 남북한 민족의 하나님이고, 세계민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교육하는 것이다. 헌데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전쟁을 일으켜 하나님의 피조물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강대국을 찬양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탐욕에 길들여진 인간들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나라로 나가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다. 현재에 안주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켰다.

3.1만세운동의 주체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이 땅의 기독청년, 기독여성, 기독농민 등 기층민중이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3.1만세운동의 주체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이 땅의 기독청년, 기독여성, 기독농민 등 기층민중이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한민족 화해의 길로
분단된 상태로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강대국을 찬양하는 우상숭배서 벗어나라

3.1만세운동 105주년, 광복 79, 해방 79년을 맞았지만, 3.1만세운동과 광복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조국 대한민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적대적 관계를 조성하며, 분단의 벽은 높아지고, 단절의 깊이는 더해가고 있다. 남과 북은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었다. 오늘 대한민국은 남북한 간, 지역 간, 세대 간, 노사 간, 남녀 간 적대적 관계를 조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념갈등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데 참담하다.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 아래 열리는 3.1105주년 기념행사마저도 하나 되지 못하고, 단체마다 각자 광화문일대에서 열린다는데 안타깝다. 무엇보다 이들 행사는 4월 총선을 앞두고, 특정정당을 지지하는 정치집회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3.1절 행사를 정치적 집회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행사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는 관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모두가 탐욕에 길들여져 민족의 아픔을 몰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거대한 제국 이집트의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한 기득권자들의 욕심 때문에, 앗시리아 제국과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로마제국, 시리아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나라 잃은 백성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들 나라에 짓눌리어 1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신음하며, 유리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며, 행동했다. 3.1만세운동 105주년을 맞았지만, 분단된 한반도는 여전이 3.1만세운동이 미완으로 남아 있다. 분명 3.1만세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이며, 민족운동이고, 해방운동이었다. 또한 지질이도 못난 봉건통치를 마감하고, 한국의 민주국가 개시를 알리는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3.1만세운동은 민족사적, 교회사적으로 갖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사가들이 3.1만세운동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이웃국가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고, 식민지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을 믿지 못했다. 인간이 통치하는 나라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나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를 갈망했다.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3.1만세운동의 중심에 지도자는 없었다.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은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항거에 참여한 사람도 기층민중이었다. 로마치하에서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 외침은 기득권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이 외침을 외면한 이스라엘 민족은 1천년동안 이웃나라, 제국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 갈망

결국 세례요한은 민중을 선동했다는 정치적 죄목으로 십자가의 형틀에서 처형을 당했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던 한민족 역시 일제에 의해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특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3.1만세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에게는 순교의 신앙이 강하게 배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했다는 믿음과 이스라엘 민족을 파라오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셨다는 것과, 한민족을 일제의 침략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한민족의 마음속에 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담대하게 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행동했다. 분명 3.1만세운동의 주체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이 땅의 기독청년, 기독여성, 기독농민 등 기층민중이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보잘 것 없는 기층민중은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이는 일제의 총과 칼에 맞선 비폭력 평화운동이며, 저항운동이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매년 기념하는 3.1절 행사는 3.1만세운동의 주체였던 기층민중은 보이지 않고, 자칭 민족대표 33인만 기념하는 행사로 변질됐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내놓을 역사적 사건이 빈약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기독교인 16인을 내세우며, 3.1만세운동을 마치 기독교 운동으로 포장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3.1만세운동이 교회가 중심이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한민족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참여한 민족운동이라는 것을 몰각해서는 안 된다. 이 땅의 기층민중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 쓰러지면서도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민족사적, 교회사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당시 장로교 보고에 의하면, 19193월부터 10월까지 장로교 교역자만 336명이 연행되었다. 남신도 2,125, 여신도 531명이 체포되어 투옥됐다. 1918년 장로교 목사가 169, 목사후보생 102명인 점을 감안하면, 장로교 지도층 인사 대부분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고난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때가 다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고 행동했다.

모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행진을 벌였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 새로운 나라운동은 가난한 민족, 고난당하는 민족이 억압과 수탈에서 벗어나 굶주림과 질병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이루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운동이었다. 이를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 항거했다. 알게 모르게 여러 모양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했다. 모진 고문을 당하며, 피 흘리고, 죽어가면서도 나라를 찾으려고 했다. 오늘 일본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고난당하며, 죽임을 당한 백성을 생각하면, 일본은 용서를 받을 수도, 용서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이들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지금도 서슴지 않고 있다. 경제침략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 할 줄을 모른다. 용서도 빌지 않는데, 피해자인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을 용서 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교과서 왜곡, 독도영유권 주장,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시궁창보다도 못한 삶을 산 이 땅의 소녀들을 조롱하는 만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오늘 대한민국의 일부 정치인과 학자, 종교지도자들의 굴욕적인 망언과 행동은 한마디로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죄를 짓고 있다. 그것은 교회도 다르지 않다. 연합단체는 부자교단, 부자교회만 보이고, 교인들은 부자교회만 섬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맘몬우상에 길들여진 결과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민족의 희망이었던 교회,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권력을 보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남북한은 적대적 관계로 인해 전쟁의 기운만 감돌고 있다. 언제 북한의 핵미사일이 이 땅을 초토화시킬지 불확실한 시대서, 국민들은 불안한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 105년 전 오늘 일제의 총칼에 맞서 맨주먹으로 항거했던 한민족의 고난과 아픔을 몰각하고.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잃어버린 채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 교회지도자들은 예언자의 사명을 상실했다. 하나님은 소리치는 자의 소리를 듣고 행동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강대국을 섬기는 행위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이다. 민족과 역사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분명 우상은 자신을 섬기는 자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몰각하지 않고서는 강대국을 섬길 수밖에 없다. 우상 강대국은 우리 대한민국을 자유롭게 해 주지를 않는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구속하려고 달려든다. 미국은 대한민국 기업을 향해 영업비밀을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쓴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우는 대한민국 국민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다. 일본과 한국의 사이에서 중재자,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미국의 태도를 보면, 한마디로 얄밉기 그지없다. 우리는 구한말 일본에게 조선침략의 빌미를 준 가스라-테프트 조약을 잊지 않는다.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 지지로도 못난 봉건체제는 강대국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에 끌려 다니다가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는 패권전쟁을 자신들의 나라가 아닌 한반도에서 전개한 것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조선의 백성들은 새로운 나라를 얼마나 갈망했겠는가. 이 때 등장한 기독교사상과, 선교사들이 전해준 성경책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한 가닥의 희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가렴주구에 시달이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성경말씀은 정의롭고 평등한 새로운 나라로 나가는 이정표였다. 미래로 나갈 메시지였다.

이제라도 우리민족은 신자유주의 이름 아래서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국민 모두는 서로를 믿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만 3.1정신을 이어 미래로 나갈 수 있다.

신천지를 알리는 하나님나라운동

강대국을 찬양하는 한국교회의 태도는 분명 우상숭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교회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한분만을 섬긴다고 신앙고백을 하면서, 강대국을 찬양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제하에서 우상 천왕을 섬긴 죄, ‘신사참배에 참여한 한국교회는 우상, 강대국을 섬기는 우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는 우상 천왕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똑똑히 직시해야 한다.

조선 왕조 후기 가렴주구를 일삼는 부정부패한 관리들과 허례허식을 일삼고, 명분만을 찾는 무능한 양반들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나라를 다시 일으킬 희망을 백성들에게 주지를 못했다. 당시 가난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반만년을 이어온 나라의 정기는 사라졌다. 희망이 없는 나라에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는 한민족에게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무력하고 수명을 다한 조선왕조 아래서 기독교는 남녀평등, 사민평등의 사상을 내세우면서 백성들에게 파고들었다.

당시 힘겹게 살던 보잘 것 없는 백성들과 지식인들은 기독교사상에 매료돼 교회로 몰려들었다. 새로운 나라를 갈망한 가난한 백성들에게 빠르게 번져 나간 기독교사상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복음(기쁜소식=하나님의 참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참사랑은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 부정부패한 관리들과 무능한 양반들,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 제국에 맞설 수 있는 강한 힘이었다.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한 이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던 가난한 백성들은 당시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이 때 한반도에 복음(기쁜소식)이 전해졌다. 복음은 피압박 민족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이었다. 소망이었다. 해방을 향해 고난의 행진을 벌이게 했다. 이런 교회가 탐욕에 길들여진 지도자와 영미의 문화를 그대로 이식시키려고 했던 선교사들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들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권세를 가진 사람의 주변서 함께 권세를 누리려고 했다. 한마디로 제도를 만든 로마교회와 문화가 된 유럽의 교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씨조선의 봉건왕조에 비하면, 기독교의 이념과 복음은 피압박민족에게 새로운 나라로 나가는 희망이었다. 기독교는 대중 속으로 급속히 파고들었고, 문물의 이상을 추구하던 지식인들은 앞을 다투어 기독교를 신봉하고, 선교사들에게 협력했다.

이씨 왕조 봉건체제서 압제와 수탈을 당하던 민중들이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가 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은 당연했다. 민족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주었던 기독교, 교회가 오늘날 국민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복음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예언자의 사명, 복음, 하나님의 참사랑에서 에서 크게 벗어났다.

모두가 소유욕과 지배욕에 갇혀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을 만들었다. 모두가 현재에 안주하며,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해방이후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새로운 나라에 대한 이상을 스스로 저버리고 분열의 역사를 썼다. 오늘 한국교회는 영미교회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서로 갈등하며, 분열을 일삼는다. 이웃교회와 교단을 인정하지 못한다.

3.1만세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

오늘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의 산물인 시장논리와 자본논리에 갇혀, 3.1독립선언문에 담긴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도, 교인들에게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모두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산물인 사장논리와 자본논리(금융)에 갇혀, 하나님을 독점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모두가 예수님께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 어떤 목사는 자신의 아호를 흰돌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독차지 한다.

이는 이 목사뿐만 아니라, 종로 5가를 걸어 다니는 대부분의 목사가 그렇다. 오죽했으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가 이들을 향해 걸어다니는 죽은 시체라고 했겠는가. 여기에서 벗어나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나누어주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3.1정신이며, 기독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갈망하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상은 ‘3.1독립선언서에 그대로 담겨 있다.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온다. (중략)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한다. 찬바람과 꽁꽁 언 얼음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지난 시대의 불길한 기운이었다면, 온화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으로 서로 통하는 것이 다가올 시대의 상서로운 기운이니, 하늘과 땅에 새 생명이 되살아나는 이때에 세계 변화의 도도한 물결에 올라 탄 우리에게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그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조선 민족의 우수함을 꽃피우리라

당시 새로운 세상을 갈망한 기독교인들은 주체적으로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운동, 새로운 나라운동, 미래로 나가는 운동이었다. 개신교인들은 3.1만세운동 1년 동안 220여회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무능하고 부패했던 조선 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조선의 백성이 바라던 새로운 나라가 아니라, 일본 식민제국의 신민통치였다. 외세에 의해 그 못난 나라마저 잃고 이민족에게서 차별과 수탈을 받아야 했던 이 땅의 힘없는 백성들은 맨주먹으로 일제의 총칼에 맞서, 태극기를 흔들며 나라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외쳤다.

이 운동은 비폭력평화운동이었다. 정의롭고 평등한 나라를 세우는 민족해방운동이었다. 따라서 미완의 3.1운동을 완성하는 것은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이루고, 남북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인류의 평회를 위해 소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국민들의 윤택한 삶을 만들어 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이 꿈꾸고, 예수님이 선언한 하나님나라, 새로운 나라, 3.1운동에 참여한 이 나라의 백성이 자기십자가를 지고,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으면서, 갈망했던 새로운 나라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가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부활 하셨기 때문에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십자가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 보잘 것 없는 자를 섬겨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를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한반도의 평화, 한민족의 화해,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완성하는 것이, 미완의 3.1운동, 미완의 해방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국민 모두는 하나로 뭉쳐 행동하며, 봉사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평화(샬롬)운동을 이웃종교 등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