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이제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기독인들 간의 의견이 심하게 충돌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다툼이 심화될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심히 염려된다. 특히 상대가 하는 말이 과연 성경에 부합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하는 등은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 물론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념, 사상적 사고로 억지를 부리는 일은 삼가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무속, 사이비, 이단 등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오직 내편 네편 만이 존재 할 뿐 막무가내며 목소리를 높이니, “목소리 큰 자가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로 인하여 자기들에게는 어떤 유익이 있을지 몰라도, 이웃교회들 특히 중, 소형 교회들의 복음 전도의 길은 어려움을 겪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는 해 보았을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애국 애족’ 관에도 ‘솔로몬’ 왕의 친모를 구별하는 판결의 지혜를 생각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충돌되는 언행은 피해야 하기에 차라리 침묵하는 것은 어떨까? ‘성도’가 자못 막무가내기식 주장만을 하다 보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도전받는 일을 불러올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 훼손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필자의 대학 동기동창은 가족마다 불상을 모셔 놓을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가문 대대로 그리해 왔었단다. 모 은행의 지점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종교에 있어서는 가문의 전통을 따랐었다. 나는 동창 모임에 가면 가급적 말 수를 줄인다. 단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친구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그는 물론 다른 친구들도 조금씩 변화를 느끼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며, 때론 자녀 손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제는 자못 예수 믿더니 달라졌다고 그들의 효심을 자랑하기도 하며, “이러다가 나도 예수 믿는 것 아니야?”라고 말하던 친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필자가 목사라고 만날 때마다 받은 은혜를 말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변화는 열정, 강한 주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됨에 감사하였다.

역 대합실에 들어선 노인이 한 청년의 옆자리가 빈 것을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젊은이, 여기 좀 앉아도 되죠?”

“사람 있습니다.” 젊은이는 귀찮은 듯이 노인을 뿌리쳤다.

이때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가 그 자리로 다가왔다.

청년이 밝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여기 앉으세요.”

그 꼴을 본 노인이 화가 나서 물었다. “아니, 방금전에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에 청년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어떻단 말입니까? 이 아가씬 내 동생입니다.”

노인이 꾸짖었다. “허튼소리 작작하게!” “이 아인 내 딸이야!”

“내가 언제 너 같은 아들을 낳았더냐!”(출처 : 휴게소 화장실에서)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이들에게도 마음에 상처를 준다거나, 자기의 욕망을 위한가장 된 선행, 위선, 거짓 등은 물론, 복음 전도까지라도, ‘이기기 위한 주장’ 등의 생각은 위험하다. 따라서 2024년 4월 12일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마당에 가족, 친지, 이웃 등에게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가장(假裝)된 복음’ 보다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으로 ‘성도’의 진정성을 보이는 것은 어떨까?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23)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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