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에 손바닥보다도 작은 여객선에 승객들이 안심하고 올라타는 것은, 이 여객선을 책임지고 있는 선장과 선원을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었던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은 승선한 승객들을 뒤로 하고, 자신들만 빠져나가 국민들로부터 ‘공분’을 사고 있다. 또한 국민 모두를 심리적 공항에 빠지게 했다.

오늘 우리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세월호의 선장·선원과 다를 바 없는 지도자들이 많다는데 문제가 있다. 종교단체의 신도들은 선장인 목사, 신부, 스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 문제는 이런 종교지도자들이 책임성을 갖고, 망망대해를 항해하지를 않는다는데 있다. 배가 난파되어 배와 함께 죽겠다는 각오를 갖지 않고, 종교단체를 이끌어가고 있다는데 있다.

그렇다보니 대형사고는 되풀이 되고 있으며, 많은 꽃봉오리들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그렇다. 교회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분쟁, 교단 간에 일어나는 분쟁, 단체 간의 분쟁 등의 중심에는 우리가 믿었던 교회지도자가 있으며, 그 사이에서 영혼들은 죽어가고 있다. 교회들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담임목사 중심의 처방을 내놓고, 이것은 또 교회 안에서 또 하나의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회자되는 말이 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다. 이번 세월호의 선장은 물속에 잠기는 배와 승객을 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제일먼저  탈출했다. 국민 모두가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이유다.

세월호의 선장과 비교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서해안에서 일어난 훼리호 침몰사건이다. 훼리호 백운두선장은 배와 함께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백선장이 행방불명됐다며, 비난의 목소리가 고조됐다. 하지만 5일만에 백선장의 시신이 기관실에서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 그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평가를 새롭게 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월호의 선장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교인들을 생각했다면,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죽기보다 만족을 모르는 명예와 가식적인 권력에 찌든 나머지, 무능과 오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으며, 영혼들은 하나하나 죽어가고 있다.

고 이중표목사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들이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 목소리를 높인 이유도,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한국교회를 예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세월호의 참사는 지도자 한사람의 판단과 결정이 많은 생명을 구하고,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선장 한사람의 잘못은 어린생명들에게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범죄를 저질렀다. 살아난 사람들도 살아 있다는 것에 미안해야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 참담함에, 이 부끄러움에 국민들은 ‘공분’을 일으키고, 심리적 공항에 빠졌다.

또 아이들이 숨을 쉬지 못하는 것과 먹지 못하는 밥을 먹는 것에 국민들은 미안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 역시 이러한 대형참사가 일어날 때 마다 처방을 내놓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이제 국민들은 정부를 믿으려하지도 않고, ‘분노’만 남았다.

정부가 아이들의 신고를 믿고, 빨리 대처만 했더라도, 지금과 같은 많은 희생자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정부 기관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닌가 묻고 싶다. 오늘 한국교회가 우왕좌왕하며,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서 표류하고 있는 것도, 바로 선장인 목사와 선원인 평신도지도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지를 못하고, 탐욕에 사로잡혀 바벨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와 국민들은 세월호의 희생자와 가족, 그리고 국민들에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모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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