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구한말 일본제국이 우리나라에 차관 공세를 펴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예속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작업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目賀田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는 등, 1천3백만 원의 왜(倭)의 차관공세는 우리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으로 뜻 있는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 앞장을 서서, 일본 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다. 민족 언론들과 기업들, 민족지도자들이 뜻을 모으고, 고종황제와 여성들과 하류민인 기생들까지도 이 운동에 적극적 참여하였다.

1907년 대구광문사(1906년 대구에 서상돈(徐相敦)이 설립한 인쇄출판회사로서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의식을 고취하던 출판사)를 중심으로 서상돈, 김광제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하여 운동을 펼치자, 이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 운동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해서 일본이 한국정부에 강제로 떠맡긴 국채 1,300만 원을 보상하자는 것으로 국권을 수호하고,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애국적인 민족경제 수호운동이다.

당시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기관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뜻 있는 남성들은 단연(斷煙), 단주(斷酒)를 결행하는가 하면, 여성들도 탈환회(脫環會), 감찬회(減饌會-음식을 줄여 모금하자는 여성모임)등을 조직하여 성금을 모아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조선통감부(조선 총독부의 전신)는 이 운동을 배일운동으로 단정하고, 국채보상기성회 간사인 양기탁(대한매일신보 설립자요 당시 매일신문 총무)을 보상금 횡령의 누명을 씌워 구속하였으나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일본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좌초되고 말았다.

일세기 전 구한말의 사정은 오늘의 한국과 참 많이 흡사하다. 그 당시의 한반도를 둘러 싼 열강구도가 지금과 비슷하고, 당파와 패거리들의 아웅다웅하던 형국이 지금의 붕당(朋黨)적 극한대립과 흡사하며, 나라의 빚(국채)이 소리 없이 쌓여 가는 것이 그때와 많이 닮았다.

구한 말 조선이 일본의 침탈정책을 막지 못하고, 강요에 의하여 일본으로부터 빚을 들여와 나라가 채권국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갈 형국이 뚜렷하던 그때에 조선의 여성 기독인들이 모여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였다.

당시 여성의 힘으로 나라 빚을 갚을 길이 없기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자기 가락지, 비녀, 목걸이 같은 금 장식품을 팔아 나라 빚을 갚자는 운동을 일으키고, 그 모임의 이름을 탈환회(脫環會)라고 하였는데 이는 ‘가락지를 뽑는 모임’이라는 의미다.

“나라가 빚을 져 넘어가게 되었는데 가락지는 끼어서 무엇 하랴.”하고, 가락지를 뽑아 나라 빚을 갚으라고 내 놓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일 수 없었으나 우리 기독여성들은 해냈다. 지난 1998년 우리나라 경제 외환위기 때에 온 국민들이 참여하였던 ‘금 모으기 운동’의 지혜를 이 탈환회에서 배운 것이 아닐까 싶다.

이 탈환회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3가지의 원대한 일을 하기로 결의했다.
첫째, 나라의 빚을 갚는다.
둘째, 기독교 학교를 세워 교회와 겨레를 이끌어 나갈 일꾼을 기른다.
셋째, 민족 자본을 육성하여 민족 기업을 일으킨다.

이렇듯 예수 믿는 믿음과 도리의 수준이 오늘의 그리스도인인 우리와 사뭇 달랐다. 

우리 할머니들의 포부와 정열을 대하노라면 저절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옷깃을 여미며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너무나 왜소하고 초라한 후손들임이 부끄럽다.

“사람은 남녀가 일반이라 우리는 한국의 여자로 태어나서 학문에 종사하지 못하고, 다만 방적에 골몰하고, 반찬에 분주하여 사람의 의무를 알지 못하옵더니, 근 일에 들리는 말이 국채 1300만원에 전국 흥망이 갚고, 못 갚는데 있다고 떠드는 말을 듣고, … 대저 2천만 중 여자가 1천만이요, 1천만 중에서 지환(指環,반지)있는 이가 반을 넘을 터이니 지환 매쌍에 2천씩만 샘하고 보면 1천만 원이 여인 수중에 있다할 수 있습니다. … 우리나라 기백 년 풍기가 일용 사물로는 소용없는 것을 이렇듯 사랑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더니 오늘날 이 중대사를 성취하여 예비함이로다. 이렇듯 국채를 갚고 보면 국권만 회복할 뿐만 아니라 우리 여자의 힘을 세상에 전파하여 남녀동등권을 찾을 터이니…”

이는 1907년 4월 22일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탈환회의 취지문 중 일부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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