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강한자의 말은 언제나 옳다?

한 마리의 새끼양이 목이 말라서 맑은 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 때 배를 주린 이리가 좋은 일을 바라면서 굶주림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내가 마시는 물을 그처럼 대담하게 더럽히는 놈은 누구냐?” 하고 노기에 찬 ‘이리’가 말했다. “너의 겁을 모르는 태도를 용서할 수 없다.” 이 때, 새끼양은 말했다. “나리, 노하지 마셔요!”, “보세요, 나리에게서 20 걸음 이상이나 아래 개울에서 나는 물을 먹고 있지 않아요, 그럼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나리 음료수를 더럽힐 수는 없어요!” 그러나 잔인한 짐승은 말했다. “더럽히고 있어”, “개다가 작년에 너는 내 욕을 하였다.” 라고까지 하였다.

“저는 그때 낳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욕을 해요? 아직도 어머니 젖을 먹고 있는데요!”라고 새끼 양은 답했다. “네가 아니면 아마 네 형일 게다.” “저는 형이 없는데요!” “그러면 일가의 누구겠지, 너희들은 나를 언제나 욕하고 또 너희들의 양치기와 개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복수를 해야겠다.” 이렇게 말하고는 ‘이리’는 양을 물고 숲속으로 가 먹어버렸다. 별로 다른 소송이나, 재판 등의 절차도 없이(출처 : 라퐁텐 우화)

현대인들은 자유를 구가 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그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그 자유란 귀족, 평민, 노예 등 신분에 따라서 누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실례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앞세운 선진국에서도 인종차별 등으로 학대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산체제는 거론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 권력자와 피권력자? 고용주와 피고용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등 우리 사회 역시 신분 사회화 되어 있지 않은가? 작금에 모 유력인사의 자녀가 군(軍)에서 후임 병을 폭행하고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구속영장이 신청 되었으나, “피의자가 범행을 자백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며, 범행의 정도가 아주 중하지 아니한 점을 고려할 때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어 구속영장의 재청구 까지도 기각 한다”고 했단다. 그러나 군대(軍隊) 내에서 그 것도 타 부대로 전출 된 것도 아닌데 피해 병사가 “나는 처벌을 원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가는 사후 어떤 결과가 돌아올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제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그 피해 병사는 공포에 질려 있을 터인바 감이 “처벌을 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위의 권력자들에게 감히 그리 말하고 진언 할 수 있는 자들일까? 참으로 궁금하다. 만일 가해병사의 부모가 힘없는 자이고, 반대로 피해 병사가 힘 있는 부모를 둔 자였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래도 두려원서 “나는 처벌을 원치 안습니다.”라고 했을까? 또한 “구속영장도 기각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강한자의 말은 언제나 옳다.”라는 우화와 같은 의문 속에 슬픔이 엄몰해 온다. 우리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 등의 말이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따라서 작금에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세월호’ 사태, 군대 문제 등, 가슴아파하는 ‘어린양들’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으려는 ‘이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어리 섞은 자리를 버리고, 아픈 이들의 상처를 품어 줄 수 있는 양치기가 아니면 최소한 개(犬)라도 되기를 바란다. (40)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0, 45-46)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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