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위그노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대학살은 1572년 8월 24일부터 10월까지 자행 되었는데, 이는 가톨릭 세력이 개신교 신자였던 위그노인[Huguenot (프랑스내 개신교인)]들에게 행한 것으로, 학살이 시작된 8월 24일 밤이 가톨릭에서 예수님의 12사도였던 ‘바르톨로메오’(바돌로매 = 나다나엘)의 축일이었기 때문에 ‘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로도 불린다.

이 학살사건은 샤를 9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위그노의 우두머리인 ’콜리니‘(Coligny)를 암살하려는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사건의 발단은 발루아 왕조의 실권자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왕후는 가톨릭과 위그노간의 위장 화평를 위해서 위그노 진영의 중심이었던 나바르 여왕 ‘쟌 달브레’의 아들인 ‘앙리’와 자신의 막내딸(샤를 9세의 동생)인 ’마르그리트‘ 공주을 혼인시키기로 했다.

이 혼인은 만약 발루아 왕조에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 나바르에 왕위 계승권이 넘어가기 때문에 ‘마르그리트’를 통해서 모계로라도 발루아의 혈통을 계승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 때 ’마르그리트‘ 공주와 개신교 신자인 나바르의 ‘앙리’간의 정략혼인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인 개신교 지도자 ‘콜리니’를 포함한 약 1만여 명의 개신교도가 로마 가톨릭 교도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이 날 하룻밤 사이에 파리의 모든 도로가 개신교인의 시체로 뒤덮였으며, 파리의 가톨릭이 개신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이 사건은 양자 간에 전쟁으로 이어졌고 수개 월 동안 약 2만 50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졌다.(참고 : 위키백과)

이는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욕망이 부른 만행으로써, 오늘날 “같은 기독교”라고 외치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신자들을 살상한 악마적 만행(범죄행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학살에 동참할 것을 거부한 이들 있었다. “법이 허락하지 않는 살인은 할 수 없다”며 시민들의 학살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적극 거부하였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사형집행인들”이었다.(참고 :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

당시로는 아주 천하고 보잘 것 없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힘없는 사형집행인들 이었지만 “무법한 일에는 동조할 수 없다”며 담대히 거부했던 그들에게서 작금의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로마 가톨릭의 시퍼런 칼날이 법(法)인 시대에 “무고한 자들을 살해할 수는 없다”는 그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오늘날 우리의 최고의 지성이라 자처하는 이들, 양심의 보루라고 하는 종교지도자들, 특히 법을 집행하는 이들까지도 프랑스의 ‘사형집행인들’에 비해 “과연 준법정신에 대한 생각은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고개가 갸우뚱 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에게서도, 무법에 침묵하거나 이에 동조 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주장만 잘하거나, 바른 교리, 하나님 말씀을 설명만 잘하면 되는 것일까? 무신론적 허무주의나,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자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경륜과 섭리에 순응하기에 그리하는 것일까?

이제 9월은 장로교단들의 총회가 줄줄이 개회된다. 그러나 교단 지도자들 선출에 대한 잡음들을 들으며 슬픔이 세차게 몰려온다. 그러나 무법을 자행하거나 이에 동조 하면서도 스스로 돌아볼 줄 모른다면 로마 가톨릭보다 더한 위선은 아닐까?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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