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중세교회 판박이

음력 9월은 윤달이다. 우리나라는 윤달에 조상의 무덤을 이장하고, 육골을 꺼내어 화장을 하는 풍습이 있다. 그래야만 조상님께서 후손들을 보살펴주고, 복을 주며,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샤머니즘적인 믿음이 국민들의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다. 이것은 목회자를 비롯한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이다. 얼마전 복합추모공원 원장에게 묘지이장을 상담하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천안의 어느 여자목사였다.
묘지 10기를 이장하는 전화상담이었다. 음력 9월이 윤달인데 급하다는 내용이다. 이 추모공원의 원장은 9월을 피해서 이장하라고 권유했다. 헌데 목사는 9월이 윤달이기 때문에 꼭 9월에 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합추모공원은 9월이 윤달이기 때문에, 장묘에 관한 일들이 밀려 있어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 상담내용을 면면히 살펴보면, 목사에게도 역시 윤달에 조상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샤머니즘적인 생각이 습관적으로 머릿속에 박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의 예배와 교인들의 생활 속에 샤머니즘적인 요소들이 뿌리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경건해야 할 교회의 예배와 교인들의 생활을 보면, 장구치고, 북을 치며, 관객들의 혼을 빼는 무속인들의 형태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 내에서 신나는 복음성가나, 각종예배에서 춤을 추며, 회중들을 현혹시키는 모습, 예언을 미끼로 헌금을 강요하는 모습, 기복적인 신앙요소 등등은 샤머니즘적인 신앙형태이다.

심지어 무속인들과 다를 것 없는 예언, 통변, 치유, 방언 등 길흉화복을 미리 점쳐주는 영성운동가 및 부흥사들이 등장,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여기에는 항상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따라 다니며, 교회의 강단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지는 ‘복음’은 샤머니즘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믿음‘이 아니라, ’헌금의 액수‘로 결정되고 있다. 이를 비꼬는 ’믿음의 척도는 헌금액수라네‘라는 노래까지 나왔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그렇게도 많이 외쳤던 타락한 중세교회의 모습이, 한국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락한 중세교회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강남의 2500억원짜리 교회당이 들어선 이후, 경쟁적으로 맘몬교회당 건축이 줄을 잇고 있다. 서울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에 2000억짜리 교회당 건축이 시작됐다. 이 교회는 수년전에 파주시로부터 5000구 짜리 종교단체 봉안당 설치를 허가를 받고도, 교회당 건축이 우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실행에 옮기지 않고, 뒤로 미루어 놓았다. 이유는 2000억원짜리 교회당을 먼저 건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승리한자들만 남아버린 교회당(?)

분명한 것은 타락한 중세교회가 호화로운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하다가 망했다는 것이며, 바벨탑도 하늘 높은줄 모르고 높이 쌓다가 무너졌다. 한국교회도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 ‘헌금의 액수를 믿음의 척도’라며,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고 헌금을 강요하고 있다. 무리한 헌금을 드리고, 빚더미에 앉아 있는 교인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같이 한국교회가 타락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부자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교회당을 설계하고, 건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들여진 교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고도, 성공하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마치 증권시장에서 밑천을 다 날리고 뒷 모습을 보이는 영세투자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한 교인들은 교회를 등질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해서 교회는 무책임하다.이제 한국교회는 승리한 자들만이 남는 공동체로 변했다. 한마디로 남들에게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부자 공동체’로 변질됐다. 교회당도 이들의 분위기에 어울려야 하고, 무조건 교회당을 크게 짓고, 최고급으로 장식해야 한다. 교인들의 분위기와 목회자의 목회방향도 기득권자의 정서에 맞아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호에 맞아야 한다. 그것은 이들이 교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축복’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2000억, 아니 2500억짜리 교회당은 부자들의 교회로 변질된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당연하다.

부자교회와 작은 교회, 가난한 교인과 부자교인 간의 양극화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은교회는 설자리를 잃어 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교인들이 부자교회로 이동하면서, 문을 닫는 교회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또한 교회에서 패배자는 스스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이런 한국기독교를 향해, 이 땅의 약자들은 손을 내밀지 않는다. 교황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했던 것은 당연하다.

기복신앙에 길들여진 교인

기독교 복음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복을 받는다. 한마디로 복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여기에서 “모든 것”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육신적 삶에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마 6:31절) “그리하면”이 말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에 대해 기독교인 모두는 망각하고 있다.

최재석목사는 당당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는 사람은 무조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외면하고 복을 받는 데에만 역점을 둔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믿고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 이러한 신앙을 우리는 기복신앙이라고 말한다. 기복신앙은 샤머니즘, 즉 무속신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샤머니즘에서는 자기는 노력하지 않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성공하게 해달라고, 다시 말해서 복을 달라고 빈다”고 한국기독교인들의 샤머니즘적인 신앙생활을 꼬집었다.

사실 최목사의 지적과 같이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대해서 매우 인색했다. 육신의 복만을 구하는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에 길들여져 버렸다. 따라서 목회자중 상당수는 예언, 통변, 치유, 임재, 방언, 직통계시 등을 강조하며, 교인들에게 ‘복채’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교회는 유명부흥강사를 초청, 교회건축헌금을 뜯어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믿음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강단에서 외쳐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자교회의 목회자와 부자교인들이 말하는 ‘축복’이며, 믿음이다. 심지어 ‘박수무당목사’와 ‘처녀무당목사’도 등장해 한국기독교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 무당의 역할을 감당하는 부흥사 및 영성운동가들은, 교인들로부터 돈을 잘 뜯어내야 인기가 있고, 잘 팔린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마디로 무당질을 잘하여 강단을 회칠하는 부흥사들이 대접을 받는다. 이것은 오늘 한국기독교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교회마다 ‘복’을 비는 기도의 소리가 끊이지를 않고 있다. 상당수의 목회자는 복채를 많이 내는 교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이비 사제로 변질되었다. 어디에서도 과거 가난하고 천박한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목회자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약자 눈물 닦아주는 ‘한의 사제’

기독교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 무당들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한의 사제’역할을 감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당 배씨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기독교가 샤머니즘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의 사제’의 역할을 감당한 무당과, 오늘 ‘박수무당목사’와 ‘처녀무당목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분명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이 오늘 한국교회를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드리면 교회는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고 성장한다.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데만 맛을 들인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받을 세상적인 복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이것이 지나치면 이단 및 사이비종교단체로 변질된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를 타락하게 만드는 근본원인은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이 팽배해진 한국교회는 사경을 헤매며, 아사직전에 와 있다. 한국교회가 성서의 본질을 회복하고, 건강한 교회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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