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호 관 목사
인체의 신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우리 몸은 60조를 헤아리는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1/300mm 정도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세포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함으로 건강을 유지하도록 만드신 아주 신기하고 특수한 매카니즘이 우리의 몸이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작은 핏덩이로 태어난 그 몸으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죽고 생성하고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내 몸을 만들고 유지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죽을 때에 죽지 않고 버티는 그 세포가 바로 암세포라는 것이다.“죽어야 산다.”는 말은 우리 몸의 구조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교훈이고 진리인 셈이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 몸 역시 60조를 넘는 세포로 구성된 온전한 몸이었으리라. 그리고 교회라는 신비한 몸 역시 그런 세포들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구조적 이해는 잘못된 것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하면 건강한 교회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그 말을 하고 싶은 게다. 중세기 로마교회는 외형상 건강하고 탄탄해 보였으나 실은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그래서 위험천만한 비만증에 걸린 상태의 몸이었던 것이다. 운동부족 증 환자 같고, 말기 암 환자와 같아서 아주 심각한 중증이었다. 죽지 않아서 생긴 이상 징후였다. 무소불위의 교권을 휘두르는 교황청을 향하여 몰려드는 봉물짐(=돈)을 쳐다보면서“이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겠소.”라며 만족해하는 교황을 향해서“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는 그 말 역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고 응수한 교부가 있었다는 우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설파하는 것일까? 죽어야 하는 세포가 죽지 않고 암 덩어리가 되어 온 몸 구석구석에 전이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중세교회를 살리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개혁된 사람 마르틴 루터를 급히 부르시고 개혁의 봉화를 들게 하신 그 역사적 사건이 종교개혁이었고 497년 전 일이었다.

개혁자들이 외친 모토는‘오직 성경! 오직 은혜, 그리고 오직 믿음!’이었다. 이 세 가지 모토는 중세교회의 현주소가 어디였는가를 반증한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절대권위를 갖는다. 이것이 개혁교회가 견지하는 성경관이다. 그런데 중세교회는‘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판단한다.’고 가르쳤다. 교회가 성경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고, 소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경 없는 교회가 어디로 가겠는가? 그래서 오직 성경을 외친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독일어 성경을 만들어 독일교회 성도들 손에 성경을 쥐어주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구원은 인간의‘선행, 공로, 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철두철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이 개혁사상이다. 반면에 중세교회는 선행, 공적, 그리고 여러 종교의식들이 구원의 요건이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노력과 공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루터는“구원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자기 안에 아무 의나,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부르짖어야 한다. 자신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끊어져 버림을 당했다고 믿을 때 구원의 빛이 비추기 시작한다.”했다.

그는 오직 은혜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 오직 믿음으로! 이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공덕축적설을 가르쳤다. 이신득구가 아니라 이행득구사상을 가르친 것이다. 이러니 어찌 오직 믿음으로라는 분명한 나팔을 불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500년 세월이 지난 지금의 교회, 특히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한국교회를 진단한다면 어떤 보고서를 쓸 것인가? 교회 위기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아니다. 교회는 위기를 맞을 수 없다.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신학교의 위기요, 목사의 위기일 뿐이다. 목사를 만들어내는 신학교육이 위기에 봉착했고, 거기서 교육을 받아 목사가 된 그 사람들이 위기를 맞는다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 아니겠는가? 죽지 못한 세포! 아니 죽지 않은 세포는 암세포로 변질되고 온 몸으로 전이되어 몸을 쓸어 트리고 만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때가 되었을 때 죽을 줄 아는 세포같이,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처럼 죽는 그것이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개혁이 아니겠는가?

예장개혁 증경총회장·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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