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정일 목사
11월은 추수감사절이 있는 계절이다.
들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결실되고, 산에는 각종 실과들이 열매 맺은 풍요로운 절기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기에 이 가을에 감사의 잔이 흘러 넘치도록 해야겠다.

그러나 인간들 가운데는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은혜를 다반사로 배반하는 사람도 있다. 요한 웨슬레는 “감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적” 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부모에 효하고, 형제간에 우애와 이웃 간에 신의 예절로서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온 민족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는 원망과 불평불만의 매연이 가득하다. 원망과 불평불만은 전염성이 대단히 빠르고 강하다. 감사가 결핍되거나 상실되면 원망 불평이 제일먼저 찾아온다.

T. S 엘리어트는 “현대는 감사가 상실 된 불쌍한 텅 빈 시대”라고 했다.
감사를 잃어버린 삶은 우울하고 폭력적이며 종말적으로 모든 상황을 더욱 악화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과 원망을 만들어 내는 제조업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 동기생 가운데 별명이 ‘불경기’ 라는 친구가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표구사를 차리고 그림을 그리며 표구 업을 했다. 나는 가끔 오다가다 표구사에 들려서 요즈음 표구 사업이 어떠냐고 물으면 워낙 경기가 나빠서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수 없이 인사 상 사업 근황을 물으면 그때마다 ‘불경기’ 탓을 한다. 여러 번 신앙을 권면하고 ‘불경기’를 마음의 ‘호경기’로 바꿔 보라고도 했지만 평생을 호경기 한번 맞이하지 못하고 ‘인생의 불경기’ 인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아는 호경기와 불경기는 주기적으로 오고 가는데, 유독 그 친구에게만 불경기만 계속 된 것은 부정적인 ‘마음의 불경기’가 문제였던 것이다.

보는 관점과 방향이 부조리하다보면 모든 매사가 회색적이고 굽으러져 보인다.
그래서 꺄뮤는 “나는 반항 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생관을 견지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인류의 첫 번째 범죄는 감사의 궁핍에서 왔다.” 고 했다.
감사의 고갈은 불행의 증표다. 감사의 걸림돌은 염려, 근심, 불평과 원망이다.

메튜 헨리는 “감사는 더하기(+)와 같고, 원망 불평은 빼기(-)와 같다” 고 하였다.
감사는 할수록 매사가 풍요로워 지고, 원망 불평은 할수록 빈곤해 진다는 말이다.
실로 감사는 믿음, 소망, 사랑의 관문이요, 행복한 삶으로 안내하는 뛰어난 안내자이다.

감사는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에너지의 활력소요, 창조력의 공급원이다.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잠자는 유전자를 깨워서 역전시키는 명수다.
그리고 축복의 문을 활짝 열리게 하는 초월적 능력이다.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암담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자는 참된 신앙인으로 최고 신앙의 왕관(王冠)이다. 미국에서는 자녀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말이 ‘감사’ 라고 한다. 미국인들 에게는 감사라는 말이 생활화 되어 있다.

나는 오래전에 미국을 여행하면서 엘리베이터나 좁은 공간에서 미국인들을 만나면 잔잔한 미소 속에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반갑다는 그들의 언어로 인사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나를 알아서 그러는가 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화된 습성 때문이었다.
문명인과 야민 인은 ‘감사’와 ‘불평’의 길에서 갈라진다.

아우렐리우스는 “불평과 분노의 발작에 끌려가는 자가 사나이다운 사람이 아니라 감사와 부드럽고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나이다운 사람” 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3만 불에 육박하는 OECD 13.4위권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지금처럼 불평과 불만족 속에 투쟁이나 일삼고 꼼수나 부려서는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 감사의 선진국이 될 때 일류국가로 도약하는 것이다. 감사가 풍요로워질 때 생활이 기름지고 윤택해지는 행복의 낙원이 될 것이다.

대전 은목회 총무•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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