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창 훈 목사
24.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내하다’의 원문을 찾아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강대교와 같은 큰 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에 비유하고 있는데 큰 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받침기둥은 자기 머리 위에 수십 혹은 수백 톤의 짐을 올려놓고 있지만 무겁다고 투덜대거나 짜증내는 일이 없고 하루 이틀 동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10년 20년 혹은 100년 200년까지 다리의 수명이 다해서 해체될 때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것을 인내라고 말하고 있다.

내 육신의 안녕과 부요함의 차원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하고 애쓰는 성도들은 힘이 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인내해야 한다. 내가 맡고 있는 짐이 무거워도 다리를 떠받치는 기둥처럼 인내하고 내가 하는 봉사의 시간이 길고 멀어도 주님나라에 갈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인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주님께 아무 것도 이루어 드릴 것이 없다. 작은 예부터 보면 주일예배나 헌신예배나 부흥회 때 시간이 조금 길다고 해서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씀이 내게 짐이 되고 내게 적용되는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 하나 소화를 못하고 인내하지 못해서 일어서거나 시험에 드는 사람, 작정기도 하다가 채 사흘도 안 되어서 오두방정을 떨다가 그만두는 사람, 봉사하다가 기분 상하면 앞뒤 볼 것 없이 집어 던지고 그만두는 사람까지 그 상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시험을 참지 못하고 내게 약이 되는 조그마한 쓴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작은 감정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일들을 뻔히 알고도 입으로 다 말하지 못하고 참고 목회하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의 심정을 안다면 하루에 열 번씩 큰 절을 한다 해도 그 힘든 마음과 수고에 보답지 못할 것이다.

성도들이 힘들 때 꼭 욥의 인내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짐승,도 종들도 자녀들도 다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병들고 힘들어 할 때 그의 아내마저 원망하면서 떠나버렸다. 여기서 그의 아픔과 괴로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이 와서 그가 당한 환난과 고난에 대하여 죄 때문이라고 강조하면서 회개를 촉구했다. 이런 아픔을 당하면서도 욥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끝까지 인내하는 중에 갑절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인내하는 자를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인내하는 자를 주님이 인정하시고 인내하는 자를 주님이 쓰시고 축복하시게 된다.

25.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준비된 그릇이 되어야한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보시면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시되 성도들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때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게 마련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려고 애쓰는 사람, 또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세속화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 죄가 들어올 때마다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고 즉시로 무릎 꿇고 회개하는 사람, 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육신의 욕구를 누르고 정욕대로 살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게 된다. 나를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일평생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동아교회 담임,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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